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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 “근하신년(謹賀新年)” 유래 알고나 쓰나?(대자보)

말글 2015. 1. 15. 18:08

일본말, “근하신년(謹賀新年)” 유래 알고나 쓰나?(대자보)


[논단] 올해는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글의 원년이 되길 / 이윤옥

 

“선생님요, 일본에 가보니까 근하신년이라는 말이 넘쳐나던데 이거 일본말 맞습니까?” 일본어가 전공이다 보니 심심치 않게 말의 말밑(어원)을 물어 오는 사람들이 있다. 추월(追越, 앞지르기), 물류(物流), 택배(宅配) 같은 말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국민의례, 국위선양 같은 말은 많은 자료를 찾고 나서야 “일본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냈듯이 “근하신년” 역시 바로 알기 어려운 말이다.
 
한자말이라고 해서 모두 중국말에서 온 것은 아니고 상당수는 일본말에서 온 것이 많지만 서로 섞여 있어 그 말의 어원을 눈치 채기에는 쉽지 않다. 문제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이 이러한 어원을 또렷이 가려주면 좋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 일본 야후 누리집에서 보이는 "謹賀新年"이 적힌 연하장들     © 이윤옥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근하신년(謹賀新年) :삼가 새해를 축하한다는 뜻으로, 새해의 복을 비는 인사말” 이라고 되어 있을 뿐 이 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왜, 삼가 새해를 축하한다는 뜻인지 어째서 이 말이 복을 비는 인사말인지 모호할 뿐이다.
 
모호하기는 일본국어사전 <大辞林>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그 뜻은 또렷하다. “謹賀新年(きんがしんねん) : 新年を祝って賀状などに書く挨拶の語” 번역하면,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연하장 등에 쓰는 인사말” 이라고 되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근하신년”은 일본말에서 들여다 쓴 말이다. 물론 “근하”와 “신년” 이라는 말은 조선왕조 때도 쓰던 말이지만 4자로 된 “근하신년”의 뜻으로는 쓰지 않았다.
 
성종실록 11년(1480) 7월 28일자 기록에 보면, “상사(上使)가 명일이 주상의 탄신(誕辰)이라는 것을 듣고, 두목을 시켜 와서 금대구환(金帶句環) 등의 물건을 올리며 말하기를, ‘삼가 성수절(聖壽節)을 축하합니다. (上使聞明日乃上誕辰, 令頭目來進金帶句環等物曰: “謹賀聖壽節” )란 구절이 있는데 쉽게 풀자면 “중국사신이 임금의 생신을 삼가 축하한다”는 뜻으로 “근하”라는 낱말을 예전부터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하신년”과 “송구영신”은 흔히 연말연시에 한 쌍으로 쓰고 있지만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의 유래는 다르다. “송구영신”이란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원래 이 말은 관리들의 인사이동 때 쓰던 말로 1390년 12월 공양왕 때 지방관이 임기 3년을 채우도록 건의하는 내용이 <고려사, 권75>에도 보일 만큼 오래된 말이다.
 
“恭讓王二年十二月 憲司上言, “守令遞任頻數, 雖有才能, 未布政令, 民未受惠. 且送舊迎新, 其弊不貲, 願自今, 三年已滿, 有聲績者, 擢授京官, 不勝其任者, 貶黜, 以勵士風.”
 
다시 근하신년으로 돌아가자. 일본에서 근하신년이란 말을 쓰게 된 것이 “연하장(年賀狀)”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 역사는 그리 깊지 않다. 일본 위키사전에서는 ”연하장: 신년에 보내는 우편엽서나 카드를 이용한 인사장을 말함”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그러면서 “명치시기인 1871년 우편제도 성립 때부터 연하장이 생겨났고 국민들이 연말이 되면 연하장을 보내는 습관으로 정착된 것은 그로부터 16년 뒤인 1887년 무렵부터다” 라고 못 박고 있다.
 

▲ 역시 하정 (賀正)도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다.     © 이윤옥


 
연하장의 문구로는 "근하신년(謹賀新年)" 말고도 "근하신춘(謹賀新春)" , "공하신년(恭賀新年)" 같은 다양한 말이 있다. 또한 줄여서 하정(賀正) 이나 하춘(賀春) 같은 말도 있으나 2자 숙어는 윗 사람에게 보내면 실례로 알려져 있다.
 
물론 지금은 인터넷이나 슬기전화(스마트폰)의 발달로 예전 같이 연하장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줄었지만 아직도 일본인만큼 많은 연하장을 주고받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우스개소리로 일본 친구들에게 “너희들은 11월만 되면 방문을 걸어 닫고 연하장을 쓰냐? ”고 하는데 일본 사회에서 필수 항목이 “연하장 교류”다. 주변의 일본인들 말로는 적으면 몇 십장서부터 많게는 수백 장씩 연하장을 쓴다고 한다. 그것도 손수 사인을 해서 보내는 정성이 필수다. 오죽하면 인구 1억 2천명에 연하장을 10억장씩 찍어낼까 싶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연하장을 보내다 보니 거기에 적어야하는 문구가 필요하게 된 것이고 “근하신년”은 바로 거기서 나온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근하신년”이라는 말이 보이는 이른 기록으로는 신문과 잡지들이다.
 

▲ 1월1일이 되면 으레 신문에서 '근하신년' 문구를 넣었다.(1934.1.조선중앙, 왼쪽), “謹賀新年 準備에 奔忙한 京城郵便局” (1925. 12. 7. 동아일보)     © 이윤옥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1925년 10월 7일자에 보면 “謹賀新年 準備에 奔忙한 京城郵便局”이란 제목으로 ‘근하신년’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비참한 식민지시기에 조선에서 무슨 신나는 일이 있다고 “새해 연하장”을 돌렸을까 싶다. 우편국이 분망(奔忙)할 정도로 연하장이 쏟아져 들어 왔다면 그건 일본 앞잡이들이거나 조선 체류 중인 일본인들의 연하장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1930년 1월 1일 잡지 <별건곤> 제 25호에도 ‘근하신년’이 쓰이고 있다. “謹賀新年! 여러분 過歲나 잘 하섯슴닛가. 그러나 이 인사를 쓰고 안젓는 지금은 12월 중순이다. 마튼 일을 열두 번만 하면 한 살 더 먹는 雜誌人의 억울한 생활을 이때마다 새삼스레 더 늣기지만은 그래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남보다 만흔지라 新年에 대한 『벼름』이 만흔 만큼 新年을 마지하는 기분이 결코 적지 안타.(원문 그대로 실음)”
 
편집실 낙서(編輯室 落書)라는 제목의 정초 풍경 기사에 “謹賀新年”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렇듯 많이 배운 기자나 이른바 지식인들이 앞 다투어 “근하신년”을 쓰다 보니 그 말이 새해에 꼭 써야 품위가 나는 말인지 알고 너도 나도 쓰게 된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謹賀新年”이란 말이다.
 
양띠 해를 여는 새해 아침에 “근하신년”이란 말을 되새겨 보았다. 새해부터는 일본인들이 만들어 쓰는 숱한 말들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쓰는 행태를 좀 고쳤으면 좋겠다. 물론 기존에 쓰던 한자말(중국에서 유래한 말)도 우리말글로 순화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영어 따위의 외래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낱말 하나에도 우리의 얼과 정서가 깃들어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 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나의 이런 주장에 국수주의니, 어휘력이 줄어든다느니 하는 딴 지는 걸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알기 쉽고 아름다운 우리 말글을 살려 쓰는 일이 당장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또 많은 낱말은 우리말로 고쳐 쓰기가 쉽지 않은 점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쓰던 “망년회(忘年會, 보넨카이)”라는 말 대신 “송년모임”으로 고쳐 쓴 우리다. 송년이란 말도 결국 한자말이 아니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런 시비 걸 시간이 있으면 송년을 뛰어 넘는 우리말을 생각해주길 바란다.
 
노견(路肩, 로카타)을 갓길로, 추월(追越, 오이코시)을 앞지르기로, 신입생(新入生, 신뉴세이)을 새내기로 바꿔 쓰면 우리말 어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가 되살아나는 것’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 "새날"이라는 우리말을 쓰고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를 쓴 멋진 연하장     © 우정사업본부


 
새해 아침에도 계속해서 카톡방에 떠돌고 신문, 잡지 따위에서 어지럽게 쓰이고 있는 “謹賀新年 !” 이 말을 좋은 우리말로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면 머지않아 “일출(日出)” 이란 말이 사라지고 “해맞이 (해돋이)”라는 말로 자리 잡은 것처럼 더 곱고 또렷하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뀔 것임을 확신한다.
 
양띠해 2015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뜻도 모르고 쓰는 “우리말인양 행세하는 말”을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