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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北기관원 김종률 씨 "한국망명 거부당해"(연합)

말글 2010. 3. 12. 14:13

지난 4일 빈에서 출판 기자회견을 하는 김종률씨 (AP=연합뉴스)

해외도피 16년.."5천619일 같은 침대에 누웠다"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 오스트리아에서 20년 간 북한의 군수담당 정보기관으로 활동했던 김종률(75) 씨는 한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한국 측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밝혔다.

   은신 16년 만에 최근 자서전 출간을 계기로 모습을 드러낸 김 씨는 11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2006년 한국 망명까지 생각하고 주(駐)오스트리아 한국대사관 관계자와 접촉했으나 잘 안 됐다"면서 "대사관 관계자가 거절했으니, 한국 정부가 거절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뿔 달린 공산당이라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대해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의 고위 관계자는 "당시 김 씨가 대사관 측과 접촉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일이 진행되던 중 김 씨가 갑자기 연락을 끊고 다시 잠적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에도 대화가 순조롭지는 않았던 것같다"면서 "이번 기자회견 후에는 전혀 접촉이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잠적 전까지 빈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20년 간 활동하며 북한에 필요한 군수ㆍ산업용품과 건축자재 등을 구입해 북한으로 보냈던 김 씨는 지난 4일 빈에서 '독재자에게 봉사하며(Im Dienst des Diktators)'라는 제목의 독일어판 자서전을 출간, 김일성 주석의 사생활을 폭로한 뒤 오스트리아에 망명을 신청했다.

   김 씨는 "사람이 70세가 되면 죽음을 생각하는 법"이라면서 "이렇게 그냥 죽어야 하나 자문(自問)한 끝에 마지막 한마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책을 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북한군 대좌로 호위사령부 제1국(행사조직국) 경비운수부 기술담당 부부장이었으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조선기계수출입상사 부사장 등의 직함으로 활동했다"면서 "금속탐지기, 독가스탐지기 등 신변보호 장비와 창문, 벽지, 타일까지 김일성 주석의 별장에 들어갈 물건들을 모두 실어 보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1994년 잠적한 이후 "빈 외곽에 있는 조그만 농촌 마을의 지하 방에서 5천619일 동안 매일 같은 침대에 누웠다"며 그간의 어려웠던 생활을 소개했다.

   잠적 수개월 전부터 모아 놓았던 돈으로 생활했으나 곤궁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지금까지 계산해보니 담뱃값에도 못 미치는 3.5유로(한화 약 5천400원)가 평균 하루 생활비였다"면서 "지금도 돈이 없다"고 말했다.

   은신 기간에 집도 오스트리아인의 이름으로 얻는 등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고 수염과 안경으로 변장하기도 했다.

   김 씨는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해 "당장은 어렵다"면서 "0.1%, 크게 잡아 1만명도 되지 않는 김정일 주변의 무리가 독재정권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북한이 길어야 5년 정도 지탱할 것으로 판단해 죽음으로 위장한 뒤 잠적했었다. 가족들도 곧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지금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김 씨는 "16년 간 단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면서 "처와 아들, 딸이 있는데 아들은 지금 45세, 딸은 40세쯤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의 심경에 대해 "북한 공산당에게 붙잡힐까 봐 불안하다"고 덧붙였다.

   kskim@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0/03/12 06:41 송고


 

지난 4일 빈에서 출판 기자회견을 하는 김종률씨 (AP=연합뉴스)

하루 5천400원으로 생활.."북한 실체 알리려 나섰다"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 오스트리아에서 20년 간 북한의 군수담당 정보기관으로 활동했던 김종률(75) 씨는 11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하루 3.5유로(한화 약 5천400원)의 돈으로 생활하면서 5천619일 동안 같은 침대에 누웠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씨와의 일문일답.

   --16년 간 잠적하다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사람이 70세가 되면 죽음을 생각하는 법이다. 그냥 이렇게 죽어야 하나 자문했다. 마지막 한 마디를 하고 싶었고, 그것을 책으로 냈다. 한국 사람들은 북한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잠적 당시 직책은.

   ▲북한 사람들이 외국이 나올 때는 다 가짜 명칭 달고 나온다. 난 조선기계수출입상사 직원으로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소속된 곳은 호위사령부 제1국(행사조직국) 경비운수부였다. 난 북한군 대좌로 기술담당 부부장이었다.

   이에 앞서 1955년부터 1962년까지 드레스덴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해 기계설계기사가 된 뒤 귀국해 함흥의 룡성기계연합기업소에서 서기원으로 일했다.

   34세였던 1969년 호위사령부의 소환으로 군복을 입게 됐다. 이후 1994년 오스트리아에서 근무하다 잠적할 때까지 25년 간 군에 있었던 셈이다.

   조선기계수출입상사 부사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오스트리아 빈 등 유럽에서 3~6개월씩 활동하다 귀국하게 되면 다시 군복을 입고 호위사령부로 출근했었다.

   --주로 어떤 물건을 사들였나.

   ▲금속탐지기, 독가스탐지기와 같은 신변보호용 기계설비와 장비가 매년 주로 산 물건들이다.

   또 김일성 주석의 별장에 들어갈 물품들을 모두 다 사서 보냈다. 창문, 벽지, 타일까지 구입해 컨테이너에 넣은 다음 연장 2만5천㎞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북한으로 보냈다. 운송기간이 4~5개월 걸렸다.

   빈을 중심으로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에서 물건을 구입했다. 수출이 제한된 물건들에 대해서는 중개상인들에게 20~30%의 웃돈을 주고 샀다.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지만, 독재자들은 신변을 보호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북한이 5년 내 붕괴할 것으로 기대하고 탈출했다고 밝혔는데, 지금 상황은 어떻게 보나.

   ▲당장은 붕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사람들이 독재자를 미워하지만 0.1%도 되지 않는 주변의 무리가 주민들 탄압하고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잡아 1만 명도 되지 않는 그들이 독재 정권이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북한 사람들은 북한 정치가 100% 옳다고 생각한다. TV, 라디오까지 보지 못하게 하니 단순한 북한 서민들은 하나도 모르고 있다. 하지만, 다 틀렸고 썩었다. 반민주적, 반국가적 노름을 하고 있다. 화폐 위조와 같은 범죄행위도 많이 하고 있다. 난 서방의 자유를 봐서 판단할 수 있다.

   --그동안 어디에서 은신했나.

   ▲빈 인근에 있는 조그만 농촌마을의 지하 방에서 생활했다. 오스트리아 사람의 이름을 빌려 방을 얻었다. 난 1994년 10월 18일부터 5천619일 동안 같은 침대에 누웠다. 나에게는 달력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매일 시간과 분초를 다투며 살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했나.

   ▲유럽에서 유학하고, 20년 동안 활동하면서 아는 회사만 100~200개이다. 내가 아는 사업가들에게 '물품이 시베리아에서 도난당할 경우 내가 채워 넣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따라서 여기에 대비해 3%의 커미션은 내 몫으로 챙겨놓아 달라'고 얘기했다. 잠적하기 수개월 전 비밀리에 은행 계좌를 만들어 이 돈들을 모아 놓았다. 16년 동안 하루 평균 3.5유로의 돈으로 생활했다. 이것은 말보로 담배 1갑 가격 보다 적은 돈이다.

   --잠적 당시 죽음으로 위장했다고 했다. 이후 북한이 추적에 나선 징후는 없었나.

   ▲모르겠다. 수염도 그리고 안경도 끼는 등 변장을 했었다. 한 번도 이름을 밝힌 적이 없다.

   --북한에 남은 가족은.

   ▲한 번도 연락해보지 않아 생사도 모른다. 당시 처와 아들, 딸이 있었다. 아들은 이제 45세, 딸은 40세쯤 됐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망명을 신청했는데, 얼마나 걸리나.

   ▲아주 복잡해서 1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난 돈이 없다. 담당 관청에 갔더니 경찰이 질문하는데 신문을 하듯 한다.

   --한국으로 망명할 생각은 없나.

   ▲2006년 주오스트리아 한국 대사관의 외교관들과 얘기를 했으나 잘 안됐다. 사실 한국 망명까지 생각했었다. 당시 대사관 관계자가 거절했으나, 한국 정부가 거절한 셈으로 생각한다. 내가 뿔이 달린 공산당이라 그런 것 같다.

   --지금 심경은.

   ▲북한 공산당한테 붙잡힐까 봐 불안하다.

   ks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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