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에 중독된 한국[7] 영어 개명(改名)해야 세계적 기업?(조선)
입력 : 2009.09.24 18:54 / 수정 : 2009.09.24 18:55
시니어패스(senior pass)로 어반테라스(urban terrace) 갈 수 있나요?’ 서울시의 외국어 남용을 꼬집는 질문이지만, 사실 ‘외국어 중독’은 서울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S라인’, ‘리필’ 등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도 외국어가 남용되지만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닷컴은 연속 기획으로 한국 사회 전반의 외국어 중독 상태를 진단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본다/편집자 주
지난 23일 장애인 Y모(60)씨는 kepco(한국전력)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한동안 당황했다. 전기료 할인 신청을 온라인으로 할 수 있다는 소식에 찾아왔는데 예상했던 ‘한전’이 아닌 낯선 ‘kepco’라는 회사 상징(logo)만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전력은 지난달 말 회사이름을 영문명칭(Korea Electric Power Corporation)의 약자인 kepco로 바꿨다.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하고 새로운 시대흐름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처음에는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는 Y씨는 “상단 메뉴에서 한전, 전기 등의 단어를 보고 나서야 맞게 들어왔다는 확신이 들었다”며 “남의 회사 이름에 대해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국민들이 필수적으로 이용하는 공기업들은 익숙한 우리말 명칭을 그대로 쓰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의 영어 개명(改名)이 계속되고 있다. 외국어 남용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회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기업들의 판단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코스피 상장기업 705개 가운데 14%인 99개가 회사명으로 영문 약자를 사용했고, 이 가운데 35개는 영어로만 이뤄져 있었다. 코스닥의 경우는 더욱 심해 1036개 상장사 가운데 27%인 280개는 영문 명칭 기업이었다.
최근에는 공기업들마저 잇달아 영어 이름을 쓰기로 해 논란이 가열됐다. 2005년 1월 농수산물유통공사가 ‘aT’로, 2007년 2월에는 한국도로공사가 ‘Expressway’에서 따온 ‘EX’로 바꿨다. 또 한국철도공사는 ‘코레일(KORAIL)’, 수자원공사는 ‘K-Water’, 한국가스공사는 ‘코가스(KOGAS)’,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캠코(KAMCO)’, 서울시도시개발공사는 ‘SH공사’ 등으로 변경해 이미 일반인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브랜드 전문업체 관계자는 “한글이나 한자 사명은 친근하지만 새롭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며 “기업 환경이 나날이 글로벌화되면서 토종 한국이름을 써오던 기업들이 외국어 이름으로 바꾸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한글 운동가들은 “우리 말글을 파괴하고, 무엇하는 회사인지 이름에서는 전혀 알 수 없다”며 “그런 이름으로 국제무대에서 정체성과 변별력을 지닐지도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한 포털사이트에는 “이 회사가 무슨 회사냐”고 올라온 글의 90%가 삼성 SDS, LG CNS 등 영문으로 된 회사들에 관한 것이다. 특히 한국담배인삼공사의 명칭인 ‘KT&G’의 경우 ‘Korea Tomorrow & Global’과 ‘Korea Tabacco & Ginseng’이라는 논쟁이 1년 넘게 지속되기도 했다.
기업들의 영문 개명 논란은 법정으로 비화된 적도 있다. 2002년 11월 한글학회 등이 “국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픔과 분노를 느끼게 했다”며 KT(한국통신)와 KB(국민은행)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한국통신은 1997년 10월 민영화되면서 KT로 이름을 바꿨고, 국민은행도 2001년 11월 주택은행과 합병하면서 KB로 CI(기업이미지통합)를 변경했었다.
2004년 재판부는 “옥외광고물에 외국문자만 쓰거나 한글을 썼더라도 현저하게 적게 썼다면 한글을 함께 쓰도록 한 옥외광고물법 위반”이라면서도 “침해된 권리가 개인의 권리가 아닌 사회적 이익에 해당하는 권리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개인의 정신적 피해를 배상해야 하는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주부 노모(60)씨는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지만, 적응이 느린 노년층에게는 갑자기 등장한 영문 명칭이 부담스럽다”며 “맨날 가던 기업은행이 별안간 ‘IBK’로, 손주 옷 사러 다니던 곳이 ‘아가방’에서 ‘agabang’으로 바뀌었을 때 잠깐이지만 참 난감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영문 개명이 기업 CI의 교체를 동반해 예산 낭비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한국도로공사가 CI 교체 용역에만 1억원을 넘게 썼고, 주택공사는 2004년 ‘뜨란채’에서 ‘휴먼시아(Humansia)로 아파트 브랜드를 바꾸면서 수억 원을 추가 지출했다”며 “공기업이라면 이 비용을 공익 서비스의 가격을 낮추고 질을 높이는데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광고·홍보 전문가들은 “LG와 SK처럼 성공 사례가 있는 반면 국내 영업을 위주로 하는 은행들이 소비자가 알 수 없는 영문 약어로 바꾼 것은 실패한 경우”라며 “기업들에게 영문 명칭과 CI가 필요한 것은 살실이지만, 소비자에게 저항감 없이 안착되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국인 모두가 영어를 잘해야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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