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개원 60돌-제헌국회부터 18대국회까지"이순(耳順) 걸맞은 성숙함.경륜 갖춰야"
(서울=연합뉴스) 김남권 기자 = 대한민국 국회가 오는 31일 개원 60주년을 맞는다.
지난 1948년 제헌국회 출범 이후 전쟁과 혁명,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욕을 겪으며 의회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국민의 대의기구가 어느덧 반세기를 넘어 사람으로 치면 환갑 나이에 접어드는 셈이다.
국회 60년사는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제헌국회(48.5.31~50.5.30)는 대한민국 탄생의 골간인 국회법과 헌법, 정부조직법을 제정함으로써 정부수립의 산실 역할을 했으며, 2대 국회(50.5.31~54.5.30)는 개원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 휴전성립 때까지 대전, 대구, 부산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전시 입법지원 활동과 민심수습 노력을 경주했다.
3대 국회(54.5.31~58.5.30)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안을 둘러싸고 이른바 `4사5입 개헌파동'을 겪는 등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홍역'을 앓았다.
4대 국회(58.5.31~60.7.28)는 60년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으로 인해 2년 1개월28일 만에 막을 내렸고 대통령중심제로 운영돼온 권력체제를 처음으로 내각제로 바꿨다.
4.19혁명으로 출범한 5대 국회(60.7.29~61.5.16)는 의정사상 처음으로 양원제로 운영됐지만 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9개월18일 만에 막을 내렸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비상기구가 국회를 대신하는 헌정중단사태로 이어졌다.
이어 6대 국회(63.12.17~67.6.30)는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처리문제로 진통을 겪었고, 7대 국회(67.7.1~71.6.30)는 국회의원선거 부정시비로 인해 여당 단독으로 개원, 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을 둘러싼 여야의 첨예한 대립으로 얼룩졌다.
8대 국회(71.7.1~72.10.17)는 초반부터 국가비상사태선언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안 처리문제로 여야 갈등을 빚다가 72년 10월17일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인해 해산돼 1년3개월17일 만에 임기를 마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를 대신하는 두번째 헌정중단사태를 맞았다.
`유신헌법'에 기초한 9대 국회(73.3.12~79.3.11)에서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유신정우회'가 등장했다. 국회가 태평로 시대를 마감하고 여의도 시대를 연 것도 9대때다.
유신체제 막바지에 개원한 10대 국회(79.3.12~80.10.27)는 YH사건, 신민당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사건,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서 1년7개월16일 만에 막을 내렸고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등장, 세번째로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11대 국회(81.4.11~85.4.10)는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정치활동 규제 등으로 기존 정당이 와해되고 재편성되면서 외형상 다당제의 모습을 갖췄다.
12대 국회(85.4.11~88.5.29)는 남북간에 처음으로 국회회담을 추진했고 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대통령직선제를 채택, `체육관 대통령시대'를 마감하고 민주주의 꽃을 피웠다.
국회는 이후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을 거치면서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 하의 `거수기', `통법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삼권분립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을 시도한다.
첫 여소야대 정국을 이룬 13대 국회(88.5.30~92.5.29)에서는 16년만에 국회 국정감사가 부활하고 5공 비리 청문회, 광주특위 등 5공 청산 문제가 본격 거론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 청문회에 출석, 증언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4대 국회(92.5.30~96.5.29)에서는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12.12사태에 대한 국정조사권이 발동됐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사실이 국회 대정부 질의과정에서 폭로돼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등 일대 파란이 일었다.
15대 국회(96.5.30~2000.5.29)는 97년 12월18일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소수 여당의 국회장악에 맞선 다수 야당의 사활을 건 투쟁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기는 정치인이 양산됐고 야당인 한나라당은 당 소속 의원들의 체포를 막기 위해 17차례나 단독으로 `방탄국회'를 가동했다.
97년 3~5월 한보사건 국정조사, 99년 1~2월 IMF(국제통화기금) 환란 원인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8~9월 옷로비 의혹사건 청문회와 조폐공사 파업유도의혹 국정조사 등이 잇따랐지만 정치공세만 무성했지, 정작 진상규명에는 실패해 `청문회 무용론'도 제기됐다.
역시 여소야대였던 16대 국회(2000.5.30~2004.5.29)는 그 어느 때보다 행정부를 강력하게 견제했다.
2000년 6월부터 인사청문회제도가 도입돼 국무총리, 감사원장,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 국회 동의를 요하거나 국회에서 선출하는 공직자들을 검증했다. 2003년부터는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세청장 등도 인사청문 대상에 추가됐다.
반면 국회는 각종 부정 및 비리에 연루된 의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탄국회' 소집을 남발해 자신들의 잘못에는 관대한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
총선을 한달여 앞둔 2004년 3월12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발의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헌정사상 최초로 가결되면서 국민의 대의기구인 국회가 국민의 손에 의해 뽑힌 대통령을 탄핵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2004년 5월30일 임기가 시작된 17대 국회는 `탄핵 역풍'에 힘입어 전체 299석 중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 그 동안의 여소야대 국회가 거대 여당체제로 전환됐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 `바꿔' 바람으로 총 299명의 국회의원 중 211명이 초선이었다.
처음 도입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하는 기록도 세웠다.
그러나 이 같은 `파격'에도 불구하고 17대 국회 역시 정쟁과 파행으로 점철됐다.
2004년 12월에는 국가보안법(폐지안)과 과거사법, 사립학교법, 신문법 등 소위 여권의 `4대 개혁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했고 후반기에는 국민연금법, 사학법, 로스쿨법 등으로 전선이 더 확대되면서 여야간 대립은 더 날카로워졌다.
여기에 국회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파문이나 지방선거 공천헌금 파문 등은 국회에 대한 국민의 비판적 시각을 더욱 키웠다.
조만간 출범할 18대 국회는 지금까지 국회가 보여온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고 이순(耳順)에 걸맞은 성숙함과 경륜을 갖춰 국민의 신뢰를 받는 민의의 전당으로 거듭날 막중한 책무를 갖게 됐다는 게 대체적인 지적이다.
south@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8/05/18 06:1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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