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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국민눈엔 집권할 당으로 안보여”(한겨레)

말글 2010. 8. 17. 09:13

“민주, 국민눈엔 집권할 당으로 안보여”(한겨레)
2년칩거 마치고 돌아온 손학규
대통령 후보 지지율 낮은 이유 물으니 민주당 집권의지 결여 자책
진보가치 제대로 실현해 당이 달라진 모습 보여야

» 2년칩거 마치고 돌아온 손학규.
2년 1개월의 시골 생활. 닭 키우며 엎드려 지낸 세월이지만, 그의 몸값은 오히려 올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민주당 대표 후보로 확고한 1위다. 비움으로써 채우고, 버림으로써 얻은 셈이다.

 

하지만 14년의 한나라당 생활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다. 경쟁자들은 그 지점을 정조준하고 있다. 그는 “송구스럽다”며 머리 숙이기도 했고, 한나라당에서 벌인 자신의 고투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서운해 했다. 열기가 오르는지 저고리를 벗기도 했다. 정치 일선 복귀를 선언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16일 서울 종로의 지역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춘천에 머물렀던 2년 동안 무엇을 고민했는가.

“양극화와 분열이었다. 점점 힘 있는 사람만 잘 살고 힘 없는 사람은 살기 어려워지는 사회가 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치가 과연 무엇을 했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벌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야 간섭없는 사회를 원한다. 그들은 정치를 필요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잘 살지 못하고,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정치다.”

 

-15일 공개한 글에서 양극화·분열이 치유된 ‘함께 잘사는 나라’를 강조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공정한 사회’ ‘함께 잘사는 사회’를 이야기했다. 무엇이 다른가.

“나는 그분들의 발언을 우리 사회의 문제가 거기(양극화)에 있다는 걸 다들 인식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공정한 사회를 얘기하면서 어떻게 용산참사 같은 걸 만들 수 있는가. 어제 대통령 연설은 한마디로 ‘공정하게 기회를 주겠다. 그런데 결과에 대해선 각자가 책임져라’는 것이다. 개인이 잘못하고 나태했다 하더라도, 끝까지 책임져주는게 국가가 할 일이다. 대통령의 발언은 공정한 사회에 대한 그의 인식과 철학이 얼마나 빈곤한 것인지를 보여줬다.”

-2000년엔 ‘진보적 자유주의’를 이야기하더니, 최근 쓴 글에선 ‘진보적 자유주의의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고 했다. 둘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나.

“10년 전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이란 책을 쓸 당시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제3의 길’이 전세계 진보의 대세였다. 당시 영국 노동당은 시장경제 원리를 적극 도입해 우리도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했다. 빌 클린턴의 미국 민주당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세계적 추세와 함께 1987년 민주화된 뒤 우리 사회의 민주세력도 사회적 능력을 갖추는 게 중요해졌다. 경쟁체제와 세계화에 적극 적응해야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그러다 2008년 통합민주당의 대표를 하면서 ‘새로운 진보’를 얘기했다. 진보가 좀더 적극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당시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진전시킬 기회가 없었고, 지난 2년간 조용히 지내면서 양극화와 분열이 심화되고 민주주의마저 후퇴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결론은 우리 사회에 심각한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민주주의 후퇴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폐해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것이었다. 이런 인식들 속에서 진보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10년 전엔 진보진영에게 세계화와 효율, 경쟁력을 적극 수용하는 게 필요했기 때문에 우클릭했다면, 10년 지난 지금 시점에선 ‘제3의 길’도 문제가 있었다는 반성 속에서 좌클릭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10년전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은 당시 상황에 맞았다고 본다. 그러나 10년새 시대적인 흐름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정동영 고문은 ‘담대한 진보’ 내세우면서 “과거 강조했던 중도·실용이 잘못된 것이었다”며 일종의 반성문을 내놓았다. 정 고문의 태도와는 차이가 느껴진다.

“같은 차원에 놓고 보지 말아 달라. 10여년 전 금융위기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IMF)와 세계은행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파탄의 길로 가는 게 진보의 길이었을까. 진보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사회 구성원이 함께 잘 살 수 있게 하느냐다.”

 

-2006년까지 경기도지사로 재직하면서 매진했던 게 외자유치, 영어마을 설립 등 경쟁과 효율을 극대화하는 일이었다.

“복지가 중요하지만, 복지사회를 지탱해갈 사회·국가적 능력을 키우는 것도 진보가 추구해야할 중요한 과제다. 경기지사를 할 때 고용의 진흥과 저소득층 자녀의 교육복지 증진을 위해 ‘위스타트 운동’이란 걸 했다. 영어마을도 단순히 외국어 교육기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사회적 열기가 퍼져있는 영어교육을 저소득층에게도 좋은 환경에서 보급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엘시디 단지, 외자유치에 주력한 것은 맞다. 운동권 출신 손학규가 외자유치도 잘 하고, 산업발전 위해 기업에 지원도 이렇게 잘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진보도 얼마든지 유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는 거다. 진보와 성장을 이분법적으로 봐선 안 된다. 진보는 실천을 함께 수반해야 한다. 그게 진보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길이다.”

 

-한나라당 탈당에 대해 ‘숙명이었다’, 민주당에 있는 것에 대해 ‘제자리를 찾아온 서글픈 과정이었다’고 했다. 한나라당 갔던게 판단착오였고, 외도였다는 말인가.

“1993년 당시 민자당에 입당할 때는 개혁열기가 전국을 휩쓸 때였다. 아무리 집권초기라도 김영삼 대통령의 당시 지지율은 역대 어떤 대통령도 누리지 못한 것이었다. 온 나라가 개혁의 도가니였다. 청와대 안가를 부수고, 하나회 깨뜨리고, 금융실명제 실시하고...그 개혁에 참여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뒤 한나라당은 다시 3당합당 전 보수주의 세력이 주류를 이루게 됐고, 그러면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숨을 쉴 공간 찾지 못했다. 나는 그 이후로 한나라당에서 당직 하나 가진 일 없었다. 당에서 맡기질 않았다. 저처럼 민주적·진보적인 세력들은 한나라당 내부에서 정치를 할 공간이 없었다. 한나라당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당 개혁을 말하고, 제왕적 총재를 거부하고, 남북교류협력 강조하고, 햇볕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니 당내에서 어떤 과격한 분은 평양가서 살라고 했다.”

 

-실제 한나라당의 보수화는 98년말 이회창 체제가 들어서면서 가속화됐다. 그 과정에서 손 대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다. 나는 대표적인 당내 비주류로 냉대받고 고난을 받았던 사람이다. 내가 끊임없이 요구한 게 한나라당의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그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서 있을 공간을 찾지 못해 제 길을 찾아 탈당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세력도 없이 나오느냐고 했는데, 그만큼 완전히 시베리아 벌판에 혼자 떨어져 있었다는 얘기다.”

 

-민주당 내 경쟁자들은 과거 한나라당 당적을 가졌던 것에 대해 비판할 태세다 어떻게 대처할 건가.

“개혁의 기치를 들고 참여했는데, 그 한나라당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구시대로 돌아갔다. 그 안에서 당적을 갖고 도지사를 하면서도 나는 진보적 가치를 꾸준히 추구했다고 자부한다. 다만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있음으로 인해 진보세력의 동지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줬다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천정배 의원은 ‘빅3’에 대해 ‘민주당 실패의 상징’이라고 했다. 18대 총선을 진두지휘했는데, 그 결과 민주당의 야성이 전반적으로 부족해졌다는 평가 받는다.

“제가 부족한 게 많다. 당시 당대표를 맡았을 때, 민주당이 오죽했으면 저한테 당대표 맡겼겠나. 민주당에 합류한지 6개월도 안 된사람한테. 제가 대표하겠다고 경선 나선 것도 아니고, 대선에서 사상 최대의 참패를 겪고, 어떻게 하면 야당으로 생존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궁여지책으로 이 손학규한테 맡긴 거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내 임무와 역할의 한계를 설정하고 대표직을 수행했다. 하나가 대선 때 하지 못한 야당통합, 또 하나가 총선에서 승리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야당의 명맥만은 유지하겠다. 세번째는 당을 안정시켜 다음 지도부에 넘겨주겠다. 이 가운데 야당을 하나로 만드는 것 한 가지는 이뤄냈다. 총선은 물론 안타깝다. 내심 설정했던 목표에 못미쳤다.”

 

-2008년 총선 당시 비례대표 공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비례대표 민주당의 색채에 비해서도 오히려 보수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인사를 잘했다고 큰소리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데 비례대표 의원에 대해선 달리 생각했다. 비례대표는 당의 대표나 주류가 자기 입맛에 맞는 세력을 심는 자리가 아니다. 비례대표의 본래 목적도 전문성을 강화하는 차원이다. 그래서 한분한분을 전문성 위주로 공천했다. 당시 나의 모든 관심은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는 것 밖에 없었다.”

 

-대선후보 경선시절 당내 ‘486’의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이번 당직 경선국면에선 조직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전당대회 얘기할 자리는 아닌 것 같다. 나중에 기회 있으면 말씀드리겠다.”

 

-민주당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보는가.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실천적으로 대변할 수 있느냐를 보여줘야 한다. 이를 위해선 민주당이 집권의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수권능력을 보여주는 것과도 직결된다. 빈곤층이 증가하고 사회가 양극화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게 민주당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차기 대통령 후보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는데, 손 고문은 5% 안팎. 왜 이렇게 지지율이 안 오르나.

“민주당을 다음에 집권할 정당으로 보지 않고, 계속 야당으로 남아있을 당으로 국민들이 보고 있다. 어차피 야당일 정당에서 무슨 대통령 후보에 대한 기대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당이 국민에게 ‘우리 집권합니다’ ‘이렇게 나라 더 어려워지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이렇게 일깨워줘야 한다. 우리가 전당대회 등에서 적당적당히 나갈 때, 국민들은 ‘아 저기는 그냥 야당하겠다는 거구나’ 그런 인식이 확고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의지와 능력을 보여주는 것, 이게 민주당이 지금 할 일이다.”

 

-6.2지방선거를 계기로 분출한 세대교체론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나. 손 고문 입장에선 그다지 달갑지 않을 수도 있는데.

“가치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세대교체가 아니라, 권력의 승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지의 변화보다 중요한 건 가치의 변화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를 요즘 얘기하는데, 그를 세대교체의 대표주자로 보는 것은 보수당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토니 블레어도 마찬가지였다. 40대 초반에 총리가 됐기 때문이 아니라, 집권 가능성이 없는 노동당을 집권할 수 있게 가치와 노선의 변화를 선도했기 때문이다.”

 

-경기지사 시절 세종시에 대한 입장은 어땠나.

“경기지사 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의 행정복합도시 구상에 찬성했다. 한나라당에서 찬성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냐고 하는데, 거기 있으면서 행복도시를 공개적으로 찬성했다는 건 경기도 발전도 중요하지만, 지방 균형발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기도는 세종시가 생기면 과천시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당시 지역 언론과 도의회가 어떻게 나왔을지 생각해보라.”

 

-민주세력과 개혁세력, 진보세력이 더 큰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떤 방식이 가능할까.

“우선 민주당이 변해야 한다. 제대로 된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진보적 정치세력과 진보진영에서 ‘우리가 민주당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선거 때의 전술적 연대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내용의 진보·공동체 가치를 공유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그릇을 넓혀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권주자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선두다. 박 전대표를 어찌 평가하나.

“그런 얘기 안하련다. 훌륭한 분이다.”

 

-우상호 전 민주당 대변인이 임기중에 모셨던 대표들을 평가하면서 손 고문에 대해 ‘큰싸움 잘한다는 게 장점이고 단점은 참모들과 상의 안한다’고 했다.

“칭찬은 고맙지만, 스스로 그런 평가가 합당한지 부끄럽다. 비판은 수용하고, 함께 잘 사는 나라 뿐 아니라, 주변의 동지들과도 함께 가는 자세를 갖춰야겠지. 그런데 혼자 결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꽤 있었다. 한나라당 탈당할 때 주변사람들과 별로 상의를 못했다. 민주당에 합류해서도 경선과정 비롯해 고독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잊혀지는 것이라고 들었다. 2년 동안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두렵지 않았나.

“2년의 칩거 생활을 전략으로 했다면, 지금은 도움될지 모르지만 결국 실패할 것이다. 2008년 7월6일 전당대회 마치고 정세균 대표에게 당기를 넘겨주고 이튿날 서울을 떠났다. 그때 집사람에 한 얘기가 ‘모든 것을 원점에서 시작하자’는 거였다. 정치를 완전히 접고 안하겠다고 할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경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쨌든 떠날 때 나의 모토는 ‘잊혀지자’였다. 그런데 비운다, 비운다 해도 그대로 되지 않는 게 사람의 마음이고 집념이다.”

 

글 김의겸 선임기자, 이세영 기자 kyummy@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