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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대표, FTA 사과가 먼저다 (한겨레)

말글 2012. 2. 20. 09:13

한명숙 대표, FTA 사과가 먼저다 (한겨레)

 

FTA 옹호하다 말바꾼 야당 대표, ‘내용·상황 바뀌었다’는 변명 곤란...진지한 반성·사과 있어야 앞날 기약

 

2년여 전이다. 현 정권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다. 이명박 대통령은 텔레비전 방송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세종시 원안 이전 공약을 철회하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고 후회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공약 번복에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없었다. 세종시 이전을 당당하게 반대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는 말이었다.

 

옳고 그름은 둘째 문제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명으로 일관했다. 화법도 엉망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이 죄송하다는 것인지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손해지만 대의를 위해 선심을 썼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 상황은 악화됐고, 권력의 절정기에 있던 이 대통령의 기세는 거기서 꺾였다.

 

이번에는 민주통합당의 한명숙 대표가 말바꾸기 논란에 휩싸였다. 총리 시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고 했다가 야당 대표가 된 뒤 협정 폐기를 들고나온 것 때문이다. 그럼 실제 발언은 어땠을까?

 

“(에프티에이 반대) 불법폭력시위는 국민적 저항과 분노만 남을 뿐이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앞으로 있어서는 안 되며, 정부의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 …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엄단할 것이다”(2006년 12월), “참여정부가 추진해온 균형외교, 실리외교의 결실이다. 개방은 우리 경제를 도약시킬 수 있는 기회다.”(2007년 4월)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침묵하거나 두둔하는 세력에 정권을 맡길 수 없다”는 지금과는 완전 딴판이다. 해명은 이랬다. “내용과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애초엔 이익균형이 맞았지만 지금은 굴욕외교협상을 통해 만들어진 실익 없는 협정이라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자동차 분야 재협상이 있었지만 실제 내용은 과거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가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래칫(역진방지) 등의 독소조항들이다. ‘내용이 바뀌었다’는 주장은 군색한 변명일 뿐이다. 상황변화론은 어떤가. 참 무책임한 말이다. 상황은 언제나 바뀌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언제든지 입장이 바뀔 수 있다는 말로 들릴 뿐이다.

 

굴욕협상을 한 것은 맞다. 현 정부는 자동차 분야에서 추가 양보를 했다. 그러나 더 심한 굴욕협상의 당사자는 참여정부였다. 협상 시작 전에 미국이 요구하는 4대 선결조건을 들어줬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스크린쿼터 축소, 배출가스 규제기준 완화, 건강보험 약값 재조정 등이다. 애초부터 이익균형을 달성할 수 없는 협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한 대표의 태도다. 솔직한 반성과 사과는 없고 변명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세종시 공약을 번복하는 이 대통령을 보는 듯한 모습이다. 민주당은 총선을 앞두고 정체성을 핵심적인 공천 심사 기준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지도부의 정체성과 도덕성은 어떤가. 자유무역협정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다가 아무런 반성과 사과 없이 이를 폐기하겠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정체성과 도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당을 옮기는 사람만 철새 정치인은 아니다. 시류에 따라 수시로 말을 바꾼다면 그게 바로 철새 정치인이다. 그들도 아마 이렇게 변명할 것이다. “내용과 상황이 바뀌었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가장 경멸했던 것은 기회주의였고, 가장 중시한 것은 원칙과 신뢰였다. 그는 ‘못다 쓴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보도 있고 보수도 있다”고 했다. 또 “말을 함부로 바꾸는 사람들은 지도자의 영역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했다.

 

변명은 거짓말을 낳고 자신의 행보를 더욱 꼬이게 만들기 마련이다. 더 늦기 전에 사실을 인정하고 진지한 반성과 사과가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민주당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남기 경제부장

 

jnamk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