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과학☆건강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6> 소금장수 이야기⑤ [중앙일보]

말글 2009. 5. 11. 09:17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6> 소금장수 이야기⑤ [중앙일보]

한자 쓰면서 네 눈 달린 ‘창힐’과 만나다
한자 만들어 어둠 밝힌 창힐 눈은 네 개라는데
한글 만든 세종대왕의 눈은 몇이라고 해야 하나

이야기책을 읽어주시던 평소의 어머니와는 달랐다. 방바닥에 벼루와 먹, 그리고 신문지를 깔아놓으시고는 “너도 이젠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글씨 연습도 할 겸 입춘방을 써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입춘방이 뭔데요?”라는 말에 “그래, 입춘은 한문으로 ‘봄이 온다’는 뜻이지. 그리고 방은 말이야, 이런 방이 아니고 글을 써 붙이는 종이를 ‘방’이라고 하는 거란다”라고 말씀하셨다.

밖에는 아직 고드름이 그대로인데 왜 봄이 온다고 야단인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신문지 위에 연필로 글씨본을 만들어 놓으시고 따라 쓰라고 하신다. “설 립(立), 봄 춘(春), 큰 대(大), 길할 길(吉)….” 큰 소리로 한 자 한 자 읽으시면서 또박또박 내 손을 잡고 써내려 가신다. 정성껏 이렇게 써서 기둥이나 대문에 붙이면 귀신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일년 내내 좋은 일만 생긴단다. 옛날얘기를 많이 들어서 귀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어도 처음 쓰는 붓글씨에 정신이 쏠렸다.

종이 위에 설 ‘립(立)’자의 꼭짓점을 찍는다. 먹물이 까맣게 번진다. 그 순간 한국인들의 운명을 가르는 문자의 세계, 이천 년도 넘게 지배해온 한자의 그 역사 속으로 첫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것을 그때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새 옷에 먹물을 묻히면서 백지장 위에 ‘입춘대길’ 넉 자를 겨우 완성시키자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셨다. ‘옛날 같았으면 지금쯤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을 다 떼고 ‘동몽선습’을 읽는 신동(神童)이 됐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크면 장원급제해 어사화를 모자에 달고 금의환향했을 것’이라고도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런 환상은 아버지가 방 안에 들어오시자마자 곧 깨지고 만다.

“처음 쓴 글씬데 보세요. 조금만 더 연습하면 대문에다 붙여도 되겠지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시고도 아버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입춘방이란 이렇게 쓰는 게 아녀.” 어머니 눈을 피하시고는 입춘방을 뒤집어 비춰 보신다. “봐라. 거울에 대고 비춰 봐도 이 네 글자는 똑같아 보여야 한다. 좌우가 다르면 안 되는 거다.” 원래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네 글자는 좌우가 모두 대칭형으로 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재수가 좋은 글자가 된 것이란다. 그래서 귀신이 들어와 뒤에서 봐도 똑같은 글씨로 보이니까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들어온 문으로 다시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또 한자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새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처음 만든 사람은 눈이 네 개나 달려 있었다고 한다. 황제(黃帝)의 사관이었던 ‘창힐(蒼頡)의 전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글자를 다 만들고 났더니 하늘에서는 좁쌀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또 어둠 속에서는 귀신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창힐이 ‘누가 울고 있느냐’고 묻자 귀신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둠을 지배하는 귀신이오. 그런데 당신이 글자를 만들어 빛이 환한 세상을 만들어 놨으니 내 있을 곳을 잃어 슬퍼서 우는 거요.”

나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서야 한자가 귀신을 이긴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자를 만든 사람보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아버지가 더 존경스러웠다. 칭찬 한마디 없는 아버지가 섭섭했지만 그것은 분명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과는 또 다른 아버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한참 뒤에야 안 것이지만 ‘광화문’이라고 이름을 지으신 세종대왕께서도 창힐의 그 빛으로 세상을 밝혀(光化) 백성들을 귀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창힐의 눈이 네 개였다면,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의 눈은 여섯 개쯤 되었을 것이다. 한자 속에서 나의 유년도, 소금장수 이야기도 귀신의 울음소리처럼 끝나가고 있었다. 정말 학교 갈 나이가 되었나 보다.

입춘대길, 입춘대길, 입춘대길…. 아버지 말씀을 듣고 귀신도 몰라보게 다시 대칭형으로 고쳐 쓴 입춘방 하나가 뜰 아랫방 기둥에 붙여졌다. 여인네들은 모두 다 칭찬했지만 웬일로 남자들은 내 글씨를 비웃었다. 특히 몇 살 터울밖에 안 되는 형이 놀려댔다. “지렁이다 지렁이. 지렁이가 기어간다!” 내가 약이 올라 “그래, 지렁이다. 어쩔래. 봄이 오니까 지렁이가 나오지.” 형제가 싸우는데도 이날만은 온 식구가 말리지 않고 그냥 웃는다. 그래, 묵향(墨香) 같은 향기로운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입춘방을 쓰니 정말 봄이 왔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