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국가경영과 한중일 리더십 비교(mbc)
⊙ 기조 강연
◆ 미래를 여는 세종의 리더십 | 이배용(이화여대 총장)
□ 인간주의와 합리주의 정신
- 1418년 22세의 나이로 조선왕조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던 세종대왕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현재에도 가장 높이 평가받는 한국 역사속의 최고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데, 세종의 통치 시기는 과학 기술과 한글 창제 등 조선시대의 문화적 황금기를 이루었던 시기임. 세종은 다른 무엇보다 인간주의적 정신과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포용하며, 끊임없이 소통하려 하였는데 지도자로서 국왕을 보좌하는 관료들과 통치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백성에게 진정한 마음경영을 시도하였음.
- 세종은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였으면 그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과 방법에 있어 합리성을 토대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추진력을 갖추어 나가며, 원칙과 변화를 함께 고려하였으며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지켜야 할 가치와 기존 원칙에 방향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유연하고도 합리적인 해결을 도모하여 균형과 조화의 지혜를 발휘하였음.
□ 정확한 시대적 통찰력
- 민족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민족 문화 정립 : 당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사대주의로 흐를 분위기를 견제하고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조선의 독창성과 자주성을 내세워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려 했음.
- 문화 창조와 문화 민족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문흥정책 수립 : 문화진흥의 기반은 교육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한 읍당 한 개의 학교를 만드는 작업을 하였고, 교육과 문화를 진작시키면서 세종 시대는 탄탄한 문화 부흥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음.
□ 인재등용에 나타난 균형과 조화의 ·리더십
- 세종은 지도자로서 인재등용에 통찰력과 균형, 조화의 리더십을 발휘하였는데, 적재적소에 능력 있는 관리들을 발탁하여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냈음. 젊고 참신한 인물을 선발하고 연구에 매진하게 하였고, 진정한 인재라면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파격 등용도 마다하지 않았음.(해시계,물시계 등 과학기술 성과를 이뤄냈던 장영실은 천민출신이었음)
□ 근면과 학문하는 군주로서의 리더십
-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국왕이라면 정사에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는데, 세종은 이러한 가르침에 철저히 따라서 매일 꼭두새벽부터 옷을 차려 입고 있다가 동틀 무렵에 조회를 받고 아침이 되면 업무를 시작했음.
- 항상 공부하고 연구하는 임금으로서 자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임.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정치와 학문 모두에 부지런히 하는 지도자의 모범을 보이면서 당 시대에 맡겨진 책임을 철저히 준수하였던 것. 자신의 몸을 혹사할 지라도 문화의 시대를 열어가고 백성들에 풍요로움과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
□ 포용과 배려의 리더십
- 세종은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죄를 엄히 물어 능지처참하는 벌을 내렸지만,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처벌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비록 죄수라 할지라도 지나치게 형벌을 남용하는 것을 경계하였음.
- 세종은 노인들의 상황을 세밀히 조사하여 노인들의 생계를 보장하여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음.
-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신분의 노비들에게도 마음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관비에 대하여 산후 100일의 휴가를 주도록 했으며, 남편에게까지 아이 양육을 도울 수 있도록 산후 휴가도 주었음..
□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
- 세종은 의논을 즐겨 하되, 자신의 의견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견해만을 듣지 않았는데 즉위 초부터 관원의 임명이나 국가 중대사에 있어 열린 마음으로 신하들과 논의를 즐겨하였음. 판단과 결정에서 균형을 잡으려 한 것으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약한 것, 강한 것, 작은 것, 큰 것도 포괄적으로 헤아리면서 조화롭게 판단내리고자 함.
- 원칙을 준수하되 유연성을 겸비하여 가능하면 피해를 보는 이들이 적어지도록 함. 세종은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마지막 결정을 내릴 때 항상 “이렇게 결정하고 우리가 이제 결론을 내렸을 때 혹시 억울한 자가 없겠는가. 다시 한 번 찾아보자”고 했을 만큼 매우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 했음.
⊙ 제 1 학술 회의 : 세종시대의 음악, 국방, 한글
◆ 세종대왕과 음악 | 로버트 프로바인(미국 메릴랜드주립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 세종대왕은 항상 음악에 관심이 있었고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궁중의 여러 의식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철저히 재편했고, 몇몇 곡의 상당히 긴 곡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궁중음악에 관한 세종의 견해는 중국에서 전해진 음악을 좀 더 민족주의적이고 순수하게 한국적인 음악에 중점을 두도록 하는 것으로 변화를 주었음.
- 세종에게 음악의 자문을 한 사람은 주로 박연인데, 그는 고대 음악을 연구하려는 노력을 많이했음. 중국 송대 음악과 이론에 특히 의존했음.
□ 세종시대로부터의 음기보법 : 정간보
- 정간보는 정간이라는 일련의 ‘칸’으로 만들어지는데 각각의 칸은 어떠한 한정된 시간을 함축하고 있으므로 각각의 칸에 있는 기호들은 일정한 시간에 표현되는 어떠한 의미를 보여주게 됨. 여기서 그 기호들은 여러 가지 음고악보를 통해 높낮이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 들어가 있거나, 리듬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거나, 또는 연주법을 보여주기 위한 문자악보가 적혀지기도 함.
- 리듬적으로 정확한 정간보라는 기보법은 동아시아를 모두 합쳐서 가장 일찍 나타난 것이었으며 정간보는 한국음악을 기보하는데 있어서 서양의 기보법보다 훨씬 유용함. 정간보의 정간에서는 서양의 기보법에서 엄격하게 나타나게 되는 장단의 정확성이라는 것이 강조되지 않으며 오히려 융통성이 있고 상황에 맞춰 임의적으로 해석되어 연주될 수 있도록 되어 있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간보는 여전히 이 21세기에도 수많은 전통음악들의 기보에 쓰이고 있음.
□ 새종의 음악적 유산
- 세종의 감독하에 만들어진 의례서인 ‘오례의주’는 후에 제례를 위하여 세종이 제시한 수정안을 포함하여 더욱 확대되고 상세해져서 이후 국조오례의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 이후 조선 왕조 내내 사용된(음악에 관한 규정을 포함) 의식법전이 되었음. 1471년에 만들어진 법서인 경국대전은 이와 비슷하게 세종의 통치시 이루어진 연구와 법에 바탕을 두었음. 음악가를 교육시키는 일, 의식의 거행 등 많은 규정을 포함하고 있음.
- 한국 음악 연구의 최고의 업적은 1493년에 지어진 악학궤범인데 이 책의 내용은 박연의 업적을 비롯하여 주로 세종대왕의 명에 의해 행해진 연구 결과를 담고 있음. 이 책은 수세기 동안 한국 궁중음악에 대한 표준서였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참고되고 있음.
◆ 세종대 군사적 상황과 영토경영 리더십 | 노영구(국방대학교 군사전략학부 교수,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 세종대의 대외적, 군사적 상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상당히 위협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고려말 이후 남방의 큰 위협이었던 왜구는 세종 원년의 대마도 정벌 이후 그 세력이 약화되어 조선에 위협이 되지는 못하였음. 그러나 북방의 상황은 유동적으로 진전되었는데, 조선 건국 직후 시도된 조선의 요동수복 계획과 태종대 전반기까지 있었던 북방의 여러 여진족에 대한 관할을 둘러싼 명나라와의 긴장 관계는 태종과 세종의 적극적인 대명 관계 회복을 통해 해소되었음.
- 세종은 당시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러한 양상은 세종의 적극적 영토관과 영토 회복 노력, 북방 군사체제 개편 및 적극적 군사전략 수립, 파저강 정벌전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음.
- 영토에 대한 세종의 인식 : “내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조종의 강토는 줄일 수 없는 것이다.지난 번에 야인들이 우리 땅을 침범 점거한 것이 이미 많았는데, 지금 또 물러 옮긴다면 이는 버리고 지키지 않는 것이 된다.~ 물러나 줄일 계획을 한다면 조종의 토지를 개척하는 뜻에 아주 어긋나는 것이다.”
- 조선 초기 지식인들은 우리나라가 본래 만리의 대국이라고 생각하고 각종 지도나 지리지를 편찬할 때 만주를 우리 영토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었는데, 세종의 적극적 영토관과 공세적 군사전략은 기본적으로 이같은 조선 초기 만주 등 북방 영토에 대한 적극적 영토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
- 세종의 북방 군사체계 개편 및 적극적 군사전략 : △압록강 및 두만강 일대 다수의 관방시설 설치 △예방전쟁적 성격 및 영토 밖 작전의 적극적 군사전략 채택(북방 영토에 대한 적극적 영토의식과 관련)
⊙ 제 2 학술 회의 : 정치권력과 공간 활용, 동양3국의 경우
◆ 세종의 행행(行幸(행))과 친민 정치 | 박현모(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 백성 행복 위한 왕림, 행행
- 세종은 도성 안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의 여러 곳을 빈번히 찾아다녔는데, 조선후기의 왕들과 달리, 그는 궁궐 외에 종친이나 대군들의 집에 상당기간 머무르는가 하면, 일반 신하들의 집에서 지내기도 했음. 세종은 또한 온천과 강무(왕이 직접 주관해서 사냥과 군사훈련을 겸하는 수렵대회)에서 자신의 건강을 다지는가 하면, 훈민정음이나 세제개혁 문제 등 민감한 국정사안을 신하들과 긴밀히 검토하기도 했음. 능행(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왕릉을 다녀오는 것)차 과정에서는 정치적 정통성을 확인하고 농사현황을 둘러보고, 백성들과 더불어 즐기는 여민락의 장을 펼치기도 했음. ‘임금이 왕림하여 백성들에게 행복을 준다’는 행행의 취지를 그대로 구현한 것임.
- 세종의 이러한 움직임과 백성과의 만남이 반드시 찬성하는 분위기에서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는데, 신하들의 강무반대 상소나, 잡인의 분요를 막는다며 백성들의 행행 구경을 차단하려는 관리들의 태도에서 볼 수 있음.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세종의 행행을 막지는 못해 세종은 재위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강무를 중단하지 않았음.
- 조선시대 국왕 중 매우 활동적이고 정력이 왕성했던 군주로 부단히 백성들과 직접 만나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려 노력했던 것임. 백성들의 고충을 듣고 해결하는 것이 군주와 수령들의 일차적 과제이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백성들을 교화할 책임을 군주가 지고 있다고 생각했음.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기르는 데 있으니,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다스리는 급선무다.”(세종실록 12/유12/9)
- 세종은 백성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고충과 원통함을 잘 듣되, 그들의 우왕좌왕하는 어리석음은 깨우치고 마음속에 있는 신명한 생각을 헤아려 새롭게 하는 일이야말로 세종이 행행과정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친민(親民)과 신민(新民)의 정치’였음
◆ 청나라 강희제(성조)의 남순을 통해본 君-民 관계 | 쉬카이(중국 북경대 교수)
- 성조가 강남으로 여섯 차례 순행을 시행한 것은 ‘하공(河工)의 순시, 풍속의 관찰, 관리의 다스림의 순시’라고 하는 세 가지 큰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였음. 성조는 사회의 실제적인 면에서 출발하여 여섯 차례의 남순에서 국가가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의 각종 모순을 해결하여 천하를 안정시키고 청조의 통치를 장기적으로 안정시켰음.
- 여러 차례의 남순에 필요한 자금과 물품을 경사(京師)에서 미리 준비하여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말 것을 명령했고, 이를 위반하면 군법으로 처벌을 지시함. 성조는 강남에 갔을 때도 무술훈련을 잊지 않고 훈련장에 가서 주둔하는 팔기병의 기마와 활쏘기를 검열했고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곳곳에서 붓을 들어 시를 짓기도 함.
- 성조는 남순을 통해 하천으로 인한 근심거리를 다스리고, 관리의 다스림을 정리하고, 강남백성의 정황을 파악하여 국가정책과 방책을 수립하는 데 자료로 이용하는 등 여섯 차례의 남순은 성조의 실질에 힘쓰는 정치의 실천이었으며, 기대했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음.
◆ 도쿠가와 시대 행렬에 보이는 시각의 지배 | 하라 다케시(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교 교수)
-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이 되어 에도에 막부를 개창한 이래 1867년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하기까지 264년가은 통상 에도시대 혹은 도쿠가와시대라고 불림.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본은 전국 다이묘들이 서로 천하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각축하는 전국시대였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를 거쳐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었음. 그러나 노골적 폭력으로 성립한 도쿠가와 지배에는 원래 이론적 정통성이 희박했음.
- 시각적 지배라함은 인간이 갖고 있는 내면적인 덕성에 의거한 지배를 전제로 하는 유교와는 달리 지배자 자신이 유덕자인가 아닌가를 묻지 않고 단순한 물상에 지나지 않는 외면적인 상징 자체가 시각적으로 권위를 띠게 되어 물신숭배의 대상이 됨으로써 성립하는 지배를 의미함.
- 도쿠가와시대는 ‘행렬의 시대’라 불리는데 하타모토, 다이묘, 동서 혼간지의 수장 등의 종교세력, 조선 사절, 류큐 사절, 네델란드 상관원, 그리고 초기와 말기에는 천황 등 여러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었음.
- 다이묘 행렬을 맞는 사람들의 모습
△역참내의 주민은 행렬을 기다리는 마음의 준비로서 떨어져 있는 마분 등을 줍고 땅을 고르며 물웅덩이에는 흙을 뿌렸음. 처마 밑에 걸어둔 집신은 안으로 집어넣고 문이 없는<변소 등 보기 민망한 곳에는 한 곳도 빠짐없이 발을 쳤으며> 날씨가 좋은 날은 물을 뿌려 맞을 채비를 하였음. 옛추와 카가의 본진에서는 앞뜰에는 비로 쓴 자국을 내었으며, 문의 양 옆으로는 지름이 2척, 높이가 1척 반정도 되는 크기로 후지산 모양의 모래산을 만들고 장식용의 물통을 내어 환영하였음. 고케산의 경우, 행렬이 역참이나 조카마치에 가까워져서 행렬의 선두 역할을 맡은 부대가 내는 ‘아래로’라는 선도역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행렬의 내자가 지나가는 동안 땅에 엎드려 있지 않으면 안 되었음.
△연도의 사람들은 행렬의 길이 및 가마의 장식에 따라 통행하는 다이묘의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었고 상위자이면 상위자일수록 평복의 자세를 취하였음. 가마 속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행렬 및 가마를 보는 것만으로 똑같은 자세를 취했음.
△도쿠가와시대의 일본에서는 본래 교통수단인 가마 그 자체에 다이묘의 권위가 옮아가 그것을 둘러싼 행렬이 한층 더 그 권위를 연출한다는 현상이 생겨났음. 사람들은 번주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평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권위를 연출하는 상징에 시각적으로 압도되어 평복한 것으로 이같은 시각적 지배는 쇼군의 행렬이 되면 한층 더 강화됨.
- 쇼군의 행렬
△쇼군의 외출 시에는 다이묘가 거주지에서 행차길을 향해 평복하였음. 다이묘조차 쇼군의 신체는 고사하고 쇼군이 타고 있는 가마조차도 볼 수 없었음
[2009-10-09]
주최 |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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