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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들 ‘있는 듯 없는 듯’…(동아)

말글 2010. 1. 8. 19:30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들 ‘있는 듯 없는 듯’…(동아)

“자질 떨어진다” 내부 평가 속 위상 추락

김기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kimkihy@donga.com
 
 

2008년 7월11일 국회 개원식. 이때까지만 해도 비례대표 의원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컸다.

“혹시 금방 이름이 떠오르는 비례대표 의원이 있나요?”

10년 이상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근무해 의원회관에선 ‘빠꼼이’로 통하는 한 한나라당 의원 보좌관이 최근 기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18대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들의 ‘존재감’이 없다”는 말이 국회 주변에서 많이 오간다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언뜻 떠오르는 얼굴이 없어 망설이다 나온 답은 ‘조윤선’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조 의원은 비례대표 의원으로서 인상적이라기보다 당 대변인이기 때문에 익숙해진 얼굴이다. 그 다음에 떠오른 A의원은 노동계 출신으로 지난해 자택에 도둑이 들어 신문 정치면이 아닌 사회면에 등장했다.

 

도난당한 물품 규모를 놓고 경찰과 주장이 달라 화제가 됐기 때문. 이에 비해 연말 국회에서 막판까지 노동관계법이 큰 현안이 됐지만 노동계 출신 비례대표 의원들의 이름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다음으론 한나라당 친박(친박근혜)계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 정도가 기억에 남았다.

 

이 보좌관은 다시 “그럼 17대 국회 한나라당 비례대표 중엔 누가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2005년 행정중심복합도시(이하 세종시) 합의에 항의해 당직과 의원직을 집어던지고 탈당한 박세일 전 의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 대변인을 맡으며 한국 정당사에서 여성 대변인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전여옥, 나경원 의원도 17대 비례대표 의원 출신이다.

 

“그럼 현재 야당의 비례대표 중에선 누가 떠오르나요?”

“22명 중 기억나는 의원이 없다”

 

세 번째 질문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몸싸움이 벌어졌을 때도 물러서지 않고 앞장서는 ‘악바리’로 유명한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떠오른다.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 대변인 출신으로 지명도가 높은 민주당 박선숙 의원, 비례대표 1번이면서도 당론에 반대해 세종시 원안 수정을 주장하는 자유선진당 이영애 의원의 얼굴도 떠올랐다.

 

 여권의 주요 정책과 현안에 반대하며 ‘저격수’ 노릇을 자임하는 의원들도 야당에는 많다. MBC 사장 출신으로 미디어관계법에 반대해 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국회에서 농성을 벌인 민주당 최문순 의원도 있다. 민주당 김진애 의원은 가장 최근에 의원 배지를 단 ‘초짜’ 의원이지만, 건축 전문가라는 전문성을 살려 등원하자마자 ‘4대강 사업’의 주 공격수로 나섰다.

 

결국 이 보좌관이 던진 세 가지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들의 ‘위상 추락’이 실감났다. 물론 전문성을 살려 차분한 의정활동을 하는 의원들도 적지 않다. 외교·안보 전문가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활약하는 정옥임 의원, 약사 출신으로 보건복지가족위원회에서 활약하는 원희목 의원, 서울시의회 의장 출신으로 세종시 원안 수정 주장을 정치권에서 처음 제기한 임동규 의원 등이다. 그러나 성실한 의정활동과 무관하게 정치인으로서 ‘강한 인상’과 자신만의 ‘브랜드’를 확고히 구축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한나라당 18대 비례대표 의원은 2009년 말 현재 22명이다. 전체 국회 비례대표 54명 중 41%를 차지한다. 제1야당인 민주당보다 7명 많다. 17대 국회의 21명(2007년 말 현재)보다 1명이 늘었다. 그러나 17대 국회 당시와 비교하면 당내 위상이나 비중은 훨씬 떨어진다는 얘기가 당 안팎에 많다.

 

당시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들은 ‘역대 최강’으로 꼽혔다. 공천심사위원장으로 공천을 주도했던 박세일 전 의원(서울대 교수 출신)은 비례대표 후보를 ‘혁명적’으로 선정했다. 김애실 한국외대 교수, 윤건영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박재완 성균관대 교수, 이주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등 교수와 연구원 출신이 대거 포함됐다. 과거 ‘전국구’로 불리던 시절 재력가와 정치인, 당료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것과 크게 달랐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는 “‘교수당’을 만들려고 하냐”는 반발이 거셌다. “왜 상위 순번에 당 중앙위원은 한 명도 없느냐”며 반발해 중앙위원들이 당 대표실 진입을 시도했고, 일부 당직자가 “‘당직자 배려’가 부족하다”며 업무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진통 속에서 막상 국회가 개회하자 상당수 비례대표 의원들이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제 몫’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초선 비례대표 의원들이 18대 총선에서 대거 지역구 공천을 받아 재선에 성공한 결과가 말해준다. 황진하, 전여옥, 나경원, 이군현, 진수희, 서상기, 박순자 의원이 지역구 의원이 됐다. 박찬숙 전 의원도 공천은 받았으나 본선에서 재선에 실패했다. 송영선 의원은 18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해 친박연대의 비례대표 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한나라당에서 전문성을 살려 차분하면서도 성실하게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비례대표 의원들. (왼쪽부터)이정현 원희목 조윤선 정옥임

“여야가 바뀐 것도 큰 원인”

또 박재완 전 의원은 정권교체 후 청와대에 입성해 대통령 국정기획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이주호 전 의원 역시 대통령 교육과학문화수석비서관을 거쳐 현재 교육과학기술부 제1차관으로 교육개혁을 주도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현재 비례대표 의원 중 다음 선거에서 지역구 공천을 받거나 청와대와 내각에서 중용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비례대표 의원이 다시 비례대표 공천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22명의 현재 비례대표 의원 중 3선의 정진석 의원을 제외하며 모두 초선이다. 이들이 19대 총선에서 지역구 공천을 받지 못한다면 정치활동을 접어야 한다.

 

같은 당 선배 의원들이 이들을 보는 눈도 냉담하다. 17대 때 비례대표를 지낸 재선 의원은 “한마디로 ‘퀄리티(quality·자질)’가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외형적인 커리어와 달리 “어떻게 이런 분들이 들어왔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이 의원의 솔직한 말이다. 상당수 초선 비례대표 의원들의 행태가 전형적인 ‘웰빙(well-being)족’ 같다는 비판도 나온다. 국회의원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어울려 다니면서 국회의원 지위를 즐기겠다는 의원이 많다는 지적.

 

역시 17대 비례대표 의원을 거친 다른 재선 의원은 “여야가 바뀐 것도 큰 원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야당 시절 비례대표가 된 의원들은 좌파 정권을 종식하고 정권교체를 이뤄야 한다는 비장한 책임감과 ‘결기’를 가지고 국회에 들어왔는데, 10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뒤인 지난해 총선에서 국회에 들어온 초선 의원들은 마음가짐부터 다르다는 것.

 

각 정당이 비례대표 의원을 50% 이상 공천하도록 돼 있는 현재 제도 덕분에 원내에 들어온 일부 여성 의원들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국회 주변에서는 지나치게 화려한 옷차림과 튀는 행동을 보이는 몇몇 여성 의원을 ‘○마담’ ‘X마담’으로 부른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례대표 공천에 대한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부산대 김용철 교수(정치학)는 “비례대표의 원래 취지는 사회 소수자를 대변하는 대표나 직능별 대표를 의회에 진출시키는 것인데, 여전히 한국에선 공천권자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