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선희 백석문화대 겸임교수·관광영어
이명박 정부의 영어 공교육 강화 주장이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다. 영어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국민이 공감한다. 하지만 대통령직 인수위의 서툰 방법론이 우리말과 글에 대한 자존심을 건드렸다. 다시 말해 '폴리티컬 코렉트니스(political correctness)'를 어긴 것이다.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는 '정치적 올바름'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번역어의 의미 전달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인지 신문에서는 많은 경우 그냥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라 쓰고 있다. 이 경우 의미 전달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영어 병기(倂記)가 필요하다.
한글은 소리글자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70%가량이 뜻글자인 한자어(漢字語)에서 왔다. 같은 소리가 여러 뜻을 가지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homonym) 현상은 소리글자보다 뜻글자에서 훨씬 더 심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한자어에서 많은 단어를 빌려 온 한글은 의미 전달이 모호할 때가 많다. 한자 병기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나는 지난여름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인질 사태로 유명해진 '적신월사'를 처음 접했을 때 불교 사찰인 줄로 알았다. 이 오해는 '적신월사(赤新月社·Red Crescent)'의 괄호 안 영어 병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풀렸다. 붉은 초승달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이슬람권 적십자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처럼 최근 들어 한자 병기만으로는 불충분한 경우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자 병기가 효율성을 잃어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요즘 젊은이에게 한자가 어렵고 낯설기 때문이다. 작년 3월, 서울의 한 유명 대학에서 신입생 384명을 대상으로 한자능력시험을 실시했다. 응시자의 20%가 자신의 이름을, 83%가 어머니 이름을, 77%가 아버지 이름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한자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대학생들이 유명 외국 연예인들의 이름은 영어로 척척 쓴다는 것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적신월사의 한자 병기는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영어 병기가 도움을 준다.
둘째, 요즘은 영어의 새로운 개념이 직수입되기 때문이다. 과거 영어가 일본을 통해 들어왔던 시절에는 한자 병기가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직수입되는 영어 단어들은 영어 병기가 더 효과적이다. 예컨대 '도덕적 해이'는 '道德的 解弛'라는 한자 병기보다는 'moral hazard'로 영어 병기하는 것이 이해하기 더 쉽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이고 영어는 명실상부한 국제어다. 영어 실력 차이로 인해 사회·경제적 격차가 커지는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를 해소하겠다는 새 정부의 노력은 바람직하다. 외국어 학습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생활 속에서 늘 사용하는 것이므로 극단적으로 영어 공용화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자존심이라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에 저촉된다. 활발한 영어 병기야말로 큰 거부감 없이 당장 실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다.
최근 들어 '신문활용교육(NIE·Newspaper In Education)'이 미래형 교육방법으로 각광받고 있다. 신문의 영어 병기가 활성화되면 교육방법으로서 신문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며 젊은 독자층을 끌어들이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조속한 영어 병기 활성화는 새 정부가 추구하는 영어 공교육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