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명저를 남긴 프랑스의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1831년 미국을 방문했다가 유럽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적 평등과 신분차별의 부재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귀족신분제가 골수까지 남아 있는 유럽과 달리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건너온 프로테스탄트들은 철저히 사회적 평등에 기반해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미국에는 흑인노예제라는 암덩어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노예제는 남북전쟁의 종식과 함께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됐고 1964년 민권법의 제정으로 인종차별이 제도적으로 금지됐지만 노예제의 후유증인 흑백갈등은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와 정치, 경제 등 모든 부분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산업화를 이룬 여타 주요 선진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종갈등은 현재 미국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며,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극복되기 어려운 과제다.
미국의 건국과 함께 백인들이 평등을 기치로 구축한 정치 피라미드의 최고정점은 항상 백인들의 차지였다. 게다가 흑인유권자의 비율이 13%에 불과한 미국에서 흑인이 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선다는 것은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권력의 핵심인 백악관이 백인이 아닌 흑인을 주인으로 맞이하는 시대가 곧 열릴 것으로 보인다.
피부색을 이유로 멸시와 천대를 받아온 흑인이, 뿌리깊은 인종갈등의 역사로 점철된 미국에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로 새로운 대통령의 탄생한다는 것과는 전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일대 사건이다.
미국 사회가 겉으로는 나이와 성별, 직업,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표방해왔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백인과 흑인은 공공화장실도 같은 사용할 수 없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남부 일대를 강타했을 때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흑인 저소득층이었다. 지금도 주요 대도시 도심의 흑인 거주지역은 범죄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있다.
이런 미국 사회에서 흑인 대통령의 탄생이라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오바마와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와의 지지율 격차는 많게는 두자릿수까지 벌어지고 있으며 많은 선거인단이 걸린 주요 경합주(州)에서의 균형추는 빠르게 오바마쪽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미국 사회가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또 알려진 것과 달리 인종갈등이라는 상처가 빠르게 치유되고 있다는 방증일까. 해답은 간단치 않다.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수재이며 유능한 변호사이자 시카고대 법학교수 출신이다.
그의 러닝메이트인 조지프 바이든 상원의원은 민주당 예비선거 과정에서 오바마를 지칭해 "정확히 발음하고 총명하며 청결하며 용모가 준수한 최초의 주류 흑인이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이는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얘기"라고 말해 논란을 불러왔다.
이런 표현은 역설적으로 말해 오바마라는 인물은 `백인주류 사회가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후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종전에 대권도전에 나섰던 흑인 정치지도자들인 알 샤프턴과 제시 잭슨 목사 등은 흑인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채 유색인종의 사회적 불만을 정치에너지로 삼는 한계로 인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다. 맬컴X와 마틴 루터 킹 등과 같은 흑인 인권운동가들은 백인주류 사회에 위험스런 존재로 각인되면서 암살당했다.
이에 비해 오바마는 흑인의 잠재된 피해의식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흑백간 갈등뿐만 아니라 빈부, 보수-진보 등 사회의 모든 대립과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을 이뤄내겠다는 것을 기치로 내걸어 계층 구분없이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어 대권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백인들이 인정할 수 있는 `위험스럽지 않고 순종적인 흑인'이 아니라 오바마는 스스로 능동적으로 백인의 지지를 빨아들이는 정치적 이미지 창출에 성공한 것이다.
농촌과 저소득층 백인 근로자층에서는 매케인에 비해 여전히 지지율이 떨어지지만 10대와 20대, 여성, 그리고 부동층, 심지어는 공화당의 네오콘들 사이에서도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히스패닉들은 오바마가 흑인이란 이유에서 처음에는 힐러리 클린턴 지지로 흘렀지만 오바마는 이들의 표심을 사는데도 성공했다.
오바마의 인기는 해외에서 훨씬 더 압도적이다.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이 미국을 제외한 70개국에서 미 대선후보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오바마는 30%인데 비해 매케인은 8%에 그쳤다. 미국 선거에 투표권도 없는 외국인을 상대로 한 이런 조사는 무의미하지만, 이런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이런 수치는 미국의 적대국뿐만 아니라 주요 우방들마저도 지난 8년간 조지 부시 대통령의 일방주의 외교노선에 신물이 났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미국 사회에서 흑인 대통령의 탄생을 바라는 심리가 만만찮음을 읽을 수 있다.
지구촌 주민들은 힘을 우위를 내세운 강대국 미국이 아니라 `친절한 미국'을 바라고 있으며 이런 기대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 후보인 오바마를 통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라크 전쟁은 현명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그래서 철군하려 한다"는 오바마는 목소리는 지구촌 주민들에게 강한 호소력으로 다가 왔으며 불량국가 지도자들과도 대화하겠다는 태도는 전쟁이 아니라 대화로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변화된 미국의 리더십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오바마가 만일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받은 인기에 상응하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는 미지수다. 차기 미국 대통령이 헤쳐나가야 할 과제와 도전이 유례없이 무겁고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탄생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미국의 정치사는 물론 국제 사회에가 새로운 시대로 들어설 것이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shpark@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8/10/27 06: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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