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독재자였다, 착하고 인내심 많은 | |
전진식 기자 | |
〈나는 조선이다〉
이한 지음/청아출판사·1만2000원
셋째아들로 권력기반 없이 왕위 올라
한 아이가 있었다. 총명했고 부지런했으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두 형들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맏형은 끊임없이 ‘사고’를 쳤으나 부모는 한없이 관대했다. 그 관대함의 의미를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둘째 형은 조용했지만 완고해 감히 다가가기도 어려웠다. 결국 아이가 선택한 것은 ‘자기 내부로의 망명’이었다. 한번 잡은 책은 100번 넘게 읽어 통째로 외웠다. 편집증에 가까운 독서는 평생 아이를 괴롭힌 눈병의 싹을 틔웠다. 부모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애초에 시작도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살가운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눈길은 오로지 맏형에게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야속했다. ‘나도 엄연히 이 집안의 아들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이는 그러지 못했다. 참았다. 그래야만 했다. 아버지는 엄했고 어머니는 무관심했다. 소년은 그렇게 인내심을 벼리며 10대를 통과했다. 21살이 되었을 때 그 아이는 한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느닷없는 일이었지만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조선조 4대 임금인 세종은 그렇게 옥좌에 올랐다. 아버지 태종은 세종의 형들인 양녕·효령대군을 제치고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렸다. 아버지를 상왕으로 모시고 세종은 4년을 ‘인턴 왕’으로 지낸다. 자신을 응원해줄 관료도, 옥새를 받을 명분도 없었던 세종의 초기는 ‘아버지의 이름으로’만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아무런 권력 기반 없이 왕이 되었지만 재위 32년 동안 그가 이룬 성취는 이후 400여년 조선을 지탱한 들보요 기둥이 된다. 세종을 ‘인턴 왕’에서 성공한 군주로 이끈 ‘비밀의 문’은 무엇일까?
세종은 ‘선량한 독재자’였다. 〈나는 조선이다〉의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세종의 카리스마는 강력하게 윽박지르거나 화를 냄 없이도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조선은 세종이라는 심장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세종은 신하들이 범접하지 못할 만큼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으면서도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 관료들의 말을 성실히 경청하고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줄 알았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발의하는 몫을 도맡았지만 인재를 중용해 그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당을 든든히 지켜주는 후원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은 동시에 ‘불행한 남자’였다.
아버지 태종은 그의 처가를 풍비박산냈던 것이다. 역모를 꾀했다는 명분을 들어 장인 심온을 주살했으며 나머지 가솔들을 나락으로 내몰았다. 세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침묵’뿐이었다. 게다가 세종의 육신은 ‘종합병동’이었다. 눈병에서 당뇨, 임질, 풍질에 이르기까지 그의 건강기록부는 참담했다.
이 모든 괴로움을 이겨낸 것은 그의 놀라운 인내심이었다. 세종은 ‘인내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의 남자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백리요 명재상의 표상인 황희는 부정축재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었으며 맹사성은 우유부단의 전형이었다. 도승지 안숭선은 다혈질의 불같은 성격이 흠이었다.
세종은 한없이 넓은 곤룡포로 그들을 감싸주었다. 전문가의 중요성을 그가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600년 전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사람이었다”는 지은이의 평대로 세종은 허례허식을 배격한 현실주의자였다.
독재자(dictator)는 그 어원이 ‘혼자 말하는 사람’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최고권력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세종도 혼자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정당했고 실천을 담보한 것이었다. 중구난방을 믿지 않았으므로 뭇사람의 의견을 막지 않고 들었으되, 결단은 단호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그를 ‘선량한 독재자’라 이르는 것이다. ‘인턴 왕’을 ‘대왕’으로 이끈 그의 인내심을 배우고 싶은 이, 귓불 때리는 칼바람을 견디는 일부터 연습해도 좋을 일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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