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당시, 선거일 180일 전부터 선관위가 무책임하게 적용해 파문이 됐던 공직선거법 제93조 1항부터 돌아보도록 하자.
"누구든지 선거일전 180일(보궐선거 등에 있어서는 그 선거의 실시사유가 확정된 때)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이 법의 규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당(창당준비위원회와 정당의 정강·정책을 포함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 또는 후보자(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를 포함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거나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을 나타내는 광고, 인사장, 벽보, 사진, 문서·도화 인쇄물이나 녹음·녹화테이프 기타 이와 유사한 것을 배부·첩부·살포·상영 또는 게시할 수 없다.
다만, 선거운동기간 중 후보자가 제60조의3(예비후보자 등의 선거운동)제1항제2호의 규정에 따른 명함을 직접 주거나 후보자가 그와 함께 다니는 자 중에서 지정한 1인과 후보자의 배우자(배우자 대신 후보자가 그의 직계존·비속 중에서 신고한 1인을 포함한다)가 그 명함을 직접주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개정 1997.11.14, 1998.4.30, 2002.3.7, 2004.3.12, 2005.8.4>"
이 조항에 의해 지난 대선 동안 7만건이 넘는 게시물이 삭제됐고 1236명의 누리꾼들이 형사입건됐다(2007년 12월 기준). 특정 정치인을 지지·추천, 혹은 반대하는 글을 '반복적으로' 게시했다는 이유로, 아니면 해당 정치인이나 그 소속 정당의 눈으로 보기에 기분나쁘거나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했다'는 의혹이 느껴졌을 경우, 그들의 자의적 해석에 의해 법의 심판을 받거나 재판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반면에, 정치인들은 수많은 기자들이 뒤를 따르고 카메라 셔터를 작렬시키는 가운데, 공공연하게 특정 대선주자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비난을 시도해도 아무런 법의 처벌을 받지 않았다. 언론이 사설이나 교묘한 편집을 동원해 실질적인 특정 후보와 특정 정당 밀어주기에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결국, 문제의 선거법은 권력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 따라 적용기준이 달랐던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말은 그래서 있는 것 같다.
'대운하 찬성 및 반대'와 '성희롱 규탄'도 선거법 위반?
당시에 드러났던 선관위의 문제점은, 법이 제정된 과거와는 달라진 현실을 돌아보지 않고 게으르게 법조항을 적용해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시켰다는 점이었다. "법이 그런 것을 우리 보러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변명을 집중적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4월 9일로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 선관위는 이제 도를 넘어선 선거법 적용에 나섰다.
세간에 알려졌듯이, 이제 선관위는 '대운하 반대'와 '성희롱 규탄'도 공직선거법 93조를 적용하고 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로 유명한 대한민국 특유의 권력기관의 법 적용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정당하게 누려도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의 선거전에 불리하다는 여지가 있으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몰려 경찰에 연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선거관리위원, 고작 이런 식으로 일하려고 세금으로 월급받나 싶은 생각도 든다.
일단,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대운하 반대'가 왜 선거법 위반이 되는지에 대한 선관위 담당자의 해명이다.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에 응한 윤석근 중앙선관위 법규해석과 과장의 발언을 간단히 요약해보도록 하자.
"대운하 찬반홍보물 배부와 게시, 토론회와 거리행진 등의 집회, 찬반서명은 선거법 위반이다."
일단 큰 틀에서의 주장은 이와 같다. 왜 위반인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일반 유권자를 상대로 하는 대운하 찬반토론은 금지되며, 언론사 주최 토론회는 (일반 유권자를 대상으로 열리더라도)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나 목적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괜찮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각각 찬성과 반대를 추진하는 단체가 일반 유권자를 대상으로 하는 토론회를 열어서 하는 것은 안된다.
토론회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찬반에 대한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을 모셔다가 연다면, 우리가 그것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선관위는 국토해양부부터 해산시켜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 내의 대운하 찬성의견을 노골적으로 온 국민이 지켜보는 언론을 통해 개진한 청와대와 정부관계자들도 모조리 공직선거법 제93조 위반을 적용시켜 경찰에 연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집회를 열며 찬성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우익 시민활동가인 서모 목사도 경찰에 연행해야 한다. 선관위가 과연 이것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기껏 해야 누리꾼끼리 모여 의견을 나누는 공간에서의 글도 모조리 색출한 선관위가 노골적으로 특정 대선주자에 대한 지지선언을 내세우며 선거운동까지 했던 정치인은 단 한 사람도 적발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비난 여론이 커지자, 선관위는 나름대로 해명을 시도했지만, 해명이 더 걸작이다.
"대운하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 운동을 일절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공직선거법상 일반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할 수 없도록 돼 있는 집회 개최나 서명·날인운동 등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권자가 직접적으로 국가기구의 정책결정에 의사표시를 하겠다는 것 자체를 제한하겠다는 의미다. 이는 선관위의 월권행위이며, 대통령의 공약임에도 반대 여론이 많아 총선공약에서 슬그머니 삭제한 특정 정당을 위한 노골적인 선거전략을 대행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운하를 반대하는 학자(혹은 교수) 모임의 토론회나 시민단체 및 환경단체가 주관하는 '대운하 반대 집회'에서 "대운하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특정 정치인을 낙선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제기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학자나 환경단체 사람들이 어디 바보인가? 괜히 선관위에 빌미나 줄 그런 말이나 하고 앉아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 정도 지능은 누구라도 갖추고 있다.
참고로,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의 '여기자 성희롱' 논란에 대한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던 여성단체 회원들도 도중에 '선거법 위반'을 이유로 경찰에 연행됐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특정 후보와 정당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와 인쇄물을 설치하고 배포할 수 없다"는 공직선거법 제90조와 제93조를 위반한 혐의라고 한다.
법 적용을 기계적으로 하면 그럴 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특정 정치인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느니 마느니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희롱'이나 '성추행' 등의 민감한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의 뼈저린 반성과 재발 방지 아닌가.
아무래도,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원칙의 관점에서 '후보직 사퇴'나 '제명'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로 해석하고 연행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여성단체 관계자들도 바보일까? 그게 정말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기한 것일까?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 규탄 집회의 목적이라면, '후보직 사퇴'나 '제명'과 같은 요구하나 마나한 요구를 하느니, "동작을 주민 여러분, 성희롱 논란을 일으킨 정몽준 후보를 낙선시켜야 합니다"라는 구호를 외쳤을 것이다.
자, 이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가상의 발언을 표현했으니, 이 글을 쓴 나도 공직선거법 위반일까? 하려면 해라. 선관위의 코미디 목록이 하나 더 늘어날 뿐이다.
그럼에도, 법 적용을 그런 식으로 실행할 생각이라면 '댓글 동원 지령'까지 내려졌다는 의혹이 제기된 정몽준 후보의 팬클럽에 대해서도 철저한 수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 역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관위야말로 '공직선거법 위반조직'이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라는 말을 주목하자면, 선거에 참여해 투표를 한 모든 유권자들이 선거법 위반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투표는 다름아닌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선관위는, 투표를 하기 위해 귀찮음을 무릅쓰고 애써 투표소까지 가서 도장을 찍고 나온 유권자들을 모조리 경찰에 연행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가장 눈에 띄는 집단은 다름아닌 선관위다. 선관위가 '공직선거법 위반'을 적용하겠다는 '대운하 집회', 그게 막히면 가장 이득을 보는 정당은 한나라당이다.
불리하다는 것을 알기에 총선 공약에서 삭제한 것이다. 선관위가 해당 집회를 막고 집회나 토론회의 의도를 검열한다면, 이득을 보는 정당은 한나라당이며 이명박 정권이다. 사실상 선관위가 한나라당의 선거전략을 대행해주는 우스운 사태가 벌어지는 것, 이는 명백히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찰은 선관위의 모든 관계자들을 연행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명백하게, 그리고 대대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단체 및 조직을 보고도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힘 없는 블로거나 누리꾼들이 그랬듯이, 명백하게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조직도 마땅히 '공직선거법 위반'에 따른 재판을 받아야 한다.
결국, 선관위는 '자승자박'을 저지르고 있는 꼴이다. 그들의 어이없는 법 적용과 지나친 월권을 아주 쉽게 판단해보자면, 최근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확실하게 선거법을 위반하고 있는 조직은 다름아닌 선관위다.
선관위는 대운하 찬성 및 반대 집회나 여성단체의 성추행 규탄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검열하기 전에, 그 스스로의 행위부터 검열하길 바란다. 우스울 정도로 민망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