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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전대통령 유서 "운명이다.화장해달라"(연합)

말글 2009. 5. 23. 16:07

<盧전대통령 서거>노무현 전대통령 유서
(양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노무현 전 대통령측이 23일 공개한 노 전 대통령의 유서내용. 2009.5.23.  ccho@yna.co.kr


(김해=연합뉴스) 황봉규 기자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집을 나서기 직전 A4 용지 1장 분량의 유서를 컴퓨터 파일 형태로 남겼다.

   이 유서에는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겪은 심적 고통, 가족과 지인들에게 미안한 심정 등 생을 마감하려는 순간의 착잡한 속내가 담겨져 있다.

   봉하마을 사저의 대변인 역할을 해온 김경수 비서관은 23일 노 전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양산 부산대병원에서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복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A4용지 1장짜리 `보도참고자료'를 배포했다.

   이 자료에서 노 전 대통령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면서 먼저 주변 사람들에 대해 미안함을 표시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어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면서 그 동안 큰 고통을 겪었고, 이제 삶을 마감하기로 결심했음을 드러냈다.

   또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면서 가시밭길 같은 현실 앞에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품어온 생각임을 강조하며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달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유언을 끝맺었다.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사저에 있는 컴퓨터에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라는 제목의 파일로 이 유서를 남겼으며, 파일 저장시간은 투신 1시간 19분 전인 `오전 5시21분'이었다고 김경수 비서관이 전했다.

   bong@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9/05/23 15:21 송고

 

 

 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삶(연합)

<盧전대통령 서거> 근조(謹弔)알리는 노사모 팬카페
(서울=연합뉴스) 23일 오전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노사모 팬카페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알리고 있다. 이날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노사모 팬카페에는 추모의 글이 잇따르고 있다. 2009.5.23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기자 = 빈농의 아들, 노동현장의 투사에서 대통령, 그리고 검찰 출두와 자살...

   23일 63세를 일기로 타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숨길과 희비가 담긴 한편의 '서사시'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그만의 '원칙'과 지역주의에 항거했다가 번번이 좌절한 '소신'을 무기로 최고 권좌에 올랐지만 퇴임 후 짧았던 삶은 불행했던 전직 대통령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초라했다.

   정치개혁을 외치며 현실정치의 벽과 온몸으로 맞섰지만 역설적이게도 '깨끗한 정치'를 향한 부르짖음은 그의 명예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참담한 마지막 길을 걷게 한 족쇄가 됐다.

   인권 변호사로 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대통령에 당선돼 재임할 때까지 그는 늘 한국정치의 이단아였다.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민주당의 영남 출신 대선후보, 국회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고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헌정사상 첫 대통령 등 그의 정치역정은 그야말로 파격과 기록, 그 자체였다.

   그래서 세간에서 불리는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칭이 늘 따라붙었고 또한 친숙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학업에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비상한 두뇌를 지녔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의 꿈을 일찌감치 접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 세상에 큰 뜻을 펼치고픈 야망은 고교 졸업 후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를 법조인의 길로 이끌었다.

   수차례의 고배를 마신 끝에 나이 서른에 사법고시에 합격, 판사의 길을 걷다 "적성에 맞지 않아" 7개월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전직했다.

   잠시 안락한 삶을 살던 그가 인권 변호사의 가시밭길로 접어든 것은 81년 부림사건 변론이 계기가 됐다. 이후 소외받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편에 서서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노 전 대통령은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건을 통해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렸다.

   당시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지만 돈키호테 같은 용기를 눈여겨본 김영삼 (金泳三)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측의 권유로 88년 13대 총선에 출마, 5공 실세였던 허삼수(許三守) 후보를 꺾고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신데렐라처럼 부상, 한국정치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게 한 무대는 88년 5공 청문회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를 시청하던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청문회 스타'가 된 것.

   그러나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90년 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의 손을 뿌리치고 합류를 거부한 뒤 지역주의의 벽에 막혀 낙선을 거듭하는 등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동시에 영남 출신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뜻을 함께한 그의 '소신'은 대통령의 길로 이끈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98년 보선에서 '김대중 깃발' 아래 종로에 도전,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총선에서 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워 고향 부산에 내려갔다가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고배를 들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대통령 노무현'을 있게 한 소중한 패배였다.

   그의 무모함은 '바보 노무현'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을 타고 대중, 특히 영.호남 지역주의에 지친 표심을 파고들면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바람과 2002년 대선을 휘감은 `노풍'을 일으킨 기폭제가 됐다.

   노풍의 진원은 호남이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고, 이는 `이인제 대세론'을 함몰시키면서 전라도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경상도 출신 후보로 나서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그는 대선날 새벽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철회했지만 마지막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정면돌파를 택했고, 정치 인생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그 특유의 승부수는 청와대 입성의 '기적'을 이뤄냈다.

   '정치인 노무현'의 승부사적 기질은 대통령 재임 중에도 옛 정치의 반동에 맞서며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여소야대 구도에서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 등 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지만, 되레 메가톤급 역풍을 불렀고, 결국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의회 독주에 제동을 걸며 과반을 차지하는 제2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 경제, 대북관계 등 거의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노 전 대통령의 무모하게 보이는 정치 실험은 그칠 줄 몰랐고,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는 청와대발 충격 발언은 민심이반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급전직하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국정 난맥상을 야기한 자충수가 됐다.

   거듭된 재보선 전패로 의회 과반을 잃고 뿌리채 흔들리던 열린우리당은 결국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했다. 사실상 국정운영의 동력을 상실, 조기 레임덕에 빠지자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원칙'에 의해 일언지하에 외면당했다.

   급진적 개혁정책으로 사회 전반에 피로감이 누적되는 와중에 아파트값 급등과 북한 핵실험 사태 등이 맞물리면서 여당 내부에서 탈당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정치적 동지'들마저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은 정국 타개책으로 4년 연임제 개헌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역시 한나라당의 거부로 뜻을 접어야 했다.

   대신 남북 화해협력 관계 정립에 매진, 8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한 것이 대북관계에서 큰 업적으로 남았다.

   대통령 권좌에 있는 동안에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 퇴임 후 불거진 박연차 뇌물 게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거의 유일한 자산이었던 도덕성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그를 '사지'로 몰고 갔다.

   퇴임 전 입버릇처럼 "농촌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했던 그였지만 역시 전직 대통령들이 걸었던 굴곡을 피해가지 못했다.

   인생행로를 함께 걸은 진보진영 정치인들과 젊은 386들, 특히 인생의 버팀목이었던 친형 건평씨와 부인 권양숙씨마저 수뢰 혐의로 검찰에 줄줄이 불려나가는 현실 속에서 구차한 삶보다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후대의 평가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jahn@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9/05/23 12:36 송고

 

 

盧전대통령, 투신직전 "담배 있느냐"(연합)

경찰 "노전대통령 뒷산 부엉이바위서 투신"
(김해=연합뉴스) 김영만 황봉규 기자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저 뒷산(봉화산)에 있는 일명 '부엉이 바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지방경찰청은 23일 "노 전 대통령이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밝혔다.  bong@yna.co.kr

(서울=연합뉴스) 이승관 기자 = 노무현 전 대통령은 23일 새벽 사저 뒷산(봉화산)에 있는 일명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경호관에게 "담배가 있느냐"고 물어본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이날 "노 전 대통령은 오늘 오전 뒷산으로 산책을 가서 경호관에게 `담배가 있느냐'고 물어본 것으로 들었다"면서 "경호관이 `가져올까요'라고 묻자 노 전 대통령은 '가지러 갈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바위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본 뒤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담담하게 얘기했다고 당시 근접 경호를 했던 경호관이 보고했다"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곧바로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으며, 경호관이 즉각 호송 조치를 한 뒤 이를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부엉이 바위는 사저 뒤편에서 경사 40도 정도의 비교적 가파른 언덕 위 해발 100여m 지점에 있다. 사저와 직선거리는 200여m다.

   봉하마을에서 '사자바위'로 불리는 봉수대(해발 130m)에서는 440m 정도 떨어져 있고 봉화산 정토원과는 250m정도 거리에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투신 순간에 노 전 대통령의 경호를 맡았던 경호관의 진술을 공식적으로 받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human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9/05/23 12:37 송고


 

극단적 선택 이유(연합)

<盧전대통령 서거>노 전 대통령 유서
(김해=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노무현 전대통령이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뒷산 바위에 오르기 전 사저 컴퓨터에 남긴 유서내용. 2009.5.23
seephoto@yna.co.kr

유서에 '투신자살' 선택 복잡한 심경 피력

(서울=연합뉴스) 류지복 기자 =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남긴 유서에는 투신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지를 택한 노 전 대통령의 심리상태가 투영돼 있다.

   여러 요인이 거론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검찰의 수사로 인한 심리적 압박이 투신의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40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지 실추와 낙담, 억울함이 복합적으로 겹친 결과라는 것이다.

   특히 퇴임 이후 노 전 대통령 가족이나 측근 등 주변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현 정권 하에서는 앞으로도 이런 상황에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도 작용했다는 시각이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고,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며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고,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고 밝혔다.

   측근들이 사법적 고초를 당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시이자 퇴임 이후 줄곧 불편한 관계를 형성했던 현 정권과 검찰에 대한 강한 항의의 뜻을 담은 것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노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무척 지쳤다는 얘기가 있었다"며 "검찰과 언론이 봉하마을 얘기는 들어주지도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몰아간 것 아니냐. 검찰이 정치적으로 매장시킨 타살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다 자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도덕성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것이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줬다는 분석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 도덕성을 최대 무기로 대통령의 권좌에까지 올랐지만 수뢰 혐의자로 내몰리면서 도덕성이 부정되고 비난과 조롱을 받는 상황에 처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더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지지자)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낙담한 심경을 드러냈다.

   자존심 강한 노 전 대통령이 박 전 회장의 돈을 받지 않았다며 적어도 법적으로는 거리낄게 없다고 누차 해명했음에도 오히려 의혹이 증폭되자 결백의 표시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노 전 대통령은 부인 권양숙 여사가 자신 몰래 박 전 회장의 돈을 받아썼다고 해명했지만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포괄적 뇌물의 수수 주체라는 혐의를 거두지 않았고, 급기야 지난달 30일에는 검찰청사에 출두해 소환조사를 받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떠안았다.

   검찰 수사가 노 전 대통령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부인, 아들 건호, 딸 정연씨까지 진행되면서 일가족 모두가 `부패가족' 이미지로 비친 것도 노 전 대통령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준 것으로 보인다.

   결국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사법처리 시기가 임박한 상황에서 본인이 모든 것을 안고 삶을 마감하는 것만이 사태를 풀 해법이라고 인식했다고도 볼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를 감안한 듯 유서에서 "너무 슬퍼하지 마라",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고 썼다.

   대상을 특정하진 않았지만 부인과 자녀 등 가족, 주변인사에 대한 마지막 메시지로 여겨진다.

   노 전 대통령은 며칠 전부터 주로 사저 집무실에 머물면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 정신적 압박감이 극에 달했다는 얘기도 있다. 한 측근은 "며칠 전부터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jbryoo@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9/05/23 15:42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