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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의원의 변방

말글 2009. 12. 5. 10:16

홍준표 의원의 「변방」을 읽고서

 

2009. 12. 12.(토)

 

 

 

 

사전에는 ‘변방’의 뜻이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이라고 되어 있다.

 

홍준표 의원이 ‘변방’이란 에세이집을 내고 12월 18일 교보문고 잠실점에서 펜 사인회를 한다고 한다.

 

홍 의원은 “지지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갈 수 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공부에 매달려 배고픔을 참았고, 점심 도시락을 싸갈 수 없어 주린 배를 수돗가에서 물로 채웠다”고 자존심 꼿꼿한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위하여 투지를 불태웠던 그의 굳센 의지..오히려 대구로의 진학을 위해 8킬로미터나 떨어진 읍내까지 보리쌀 두말과 가재도구를 지게에 진 아버지를 뒤따라 걸으며 “시골중학교에 다니면 이런 일이 없을 터인데 굳이 대구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부모님을 이렇게 고생 시키는구나”하며 가슴 아파한다.

 

그는 고단하고 고통스럽게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회적으로 존경도 받고 돈도 많이 벌기 위해 의과대학을 가고자 했으나 돈이 많이 든다는 아버지의 말에 육사시험을 쳐서 합격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모함을 받아 지서에 끌려가는 통에 진로를 법대로 바꿔 고려대학교 법대에 합격하고 “아버지와 작은 누나가 빚내온 입학금 5만6천 원과 한 달 하숙비 1만4천원을 들고 열여덟 살에 단신으로 동대구역에서 열차를 타고 추풍령을 넘었다”고 회상한다.

 

홍의원은 2001년 동대문 재선거에 출마해 선거 유세연설에서도 “자신은 돈 14,000원을 들고 추풍령을 넘어왔다”며, 자신의 십팔번노래 ‘추풍령’을 좋아하는 일화를 소개한 적도 있다.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 마음 편히 공부를 못했지만, 부모를 원망하긴커녕,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그는 아버지를, 어머니를 꼽았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항상 부모님을 떠올리며 올바른 길을 가고자 했다.

 

그는 만리타향인 서울에서 가정교사를 하여 번 돈으로 하숙 생활을 하다 더 이상의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할 자신이 없고 무의미해서 차라리 독학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심으로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독학과 사법시험이 만만할리 없어 고향에 가 뱃사공 보조노릇 등 닥치는 대로 살다, 부친의 격려에 힘입어 재입학 하여 1982년 검사가 되고, 1987년엔 자신의 아버지가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울산에도 부임한다.

 

1982년 지금의 아내인 이순삼 여사와 결혼하여 ‘정의를 위한 열정으로’ 검사생활을 시작해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 정덕진 파친코 사건, 광주 전남 조직 폭력배 소탕 사건을 지휘하는 등 화려한 실적을 쌓았으나 1995년 그토록 갈망해 왔던 검사직을 버리고 변호사가 된다.

 

후에 그는 TV 드라마 ‘모래시계’의 강직하고 정의로운 검사의 실존인물로 더욱 유명해진다.

 

그런데 변호사 생활은 검사시절의 후유증으로 협박에 꽤나 시달렸나 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정치라며 “나의 정치 입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거창한 명분보다는 내 가족 보호라는 지극히 단순한 차원에서 출발하였다”고 술회한다.

 

그는 17대 국회의원 동대문 선거 유세에서도 자신이 정치를 시작한 것은 가족을 보호하고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해 정치를 선택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니 엄청난 협박에 시달린 모양이다.

 

그런데 송파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그 당시 송파의 시영 아파트 등의 재건축을 6개월여 만에 마무리한 것 때문에 동대문에서 있었던 그의 선거 때 마다 송파구에서 주민들이 위로 차 찾아왔으니 열심히 지역구를 관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송파을의 첫 국회의원 선거때 선거 유세나 정치판 현실과는 다르게 선거운동 방법으로 ‘모래시계’ 노래만 틀어놓고 선거를 치뤄 당선됐다고 동대문에서의 17대 총선에서 그가 토로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의사당에 입성한 후에는 국회에서 모두가 기피하는 환경노동위원회에서 김문수 의원, 권철현 의원 등을 만나 환노위 주도권을 쥐고자 노력했으나 오세응 부의장의 사회로 노동법 날치기에 가담하였음을 오늘날까지도 부끄러워한다.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 민중당 트리오와 함께 정치활동을 하고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법률특보로 대통령선거에 참여하여 병풍사건으로 고전하던 중, 이 후보에게 “두 아드님 병역문제로 법적 문제는 없어도 국민정서가 악화될 수 있으니 대국민 사과를 하고 두 아드님 중 한 분을 소록도에 보내자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IMF 악재로 50년 만에 진보 진영에 50년 보수 정권을 내어준 일원이라는 것에 그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다 송파에서의 선거법 위반사건으로 신변정리를 한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선거법 위반사건의 공범이 되었다”고 한탄하며, “당시 여당으로 가면 무죄를 받을 수 있는 제의도 받았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그는 “탈당하여 비루하게 살 수 없으며 배신자가 되어 생존한들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하며 ‘사나이의 정정당당함’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법책임이 아닌 관리책임을 지겠다며 의원직을 사퇴하고, 큰 세상을 보기로 마음먹고 미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원 자리를 얻어 무작정 떠난다.

 

세계의 심장부인 워싱톤으로 유학을 가서 “선거법 위반 재판 도중 의원직을 사퇴한 이명박 선배와 경기도 지사 선거에서 실패한 손학규 선배를 만났으며 그들과의 만남에서 검사의 시각에서 보던 세상을, 정치인의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워싱톤에서 그의 모습은 “이승만의 건국시대,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시대, 김영삼 김대중의 민주화시대를 지나고 나면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2001년 이회창씨를 만나 동대문 을구로 출마를 권유받고 아내와 상의하여 ‘IMF 심판하는 대한민국 특별검사’라는 선거구호를 내세우고 선거전 돌입 한 달 만에 동대문 주민들의 도움으로 압승하여 재정경제위원회에 배정받아 의원회관 707호에 당당히 여의도에 입성하게 된다.

 

그 후로 김대중 대통령을 무력화시켰으나 검찰발로 시작된 병풍사건의 재점화로 김대업이 등장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고 선거에 진 이회창 씨는 정계은퇴를 했다. 이어 17대 총선에서 동북부 17개 선거구중 자신만 당선되는 신화를 이루어냈고, 서울시장 경선에서의 실패, 한나라당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에서 실패하게 된다.

 

그는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간에 맞붙은 한나라당 경선 판도가 깨질 것을 걱정해야만 했고, 양 후보 진영의 러브콜도 마다하고 끝까지 완주하는 저력을 보여 여기서도 그의 당당함은 한결 돋보인다. 결국 홍 의원은 2007년 8월 20일 잠실체육관 경선결과를 보고 “나 자신에 대한 결과는 참담했지만 한나라당이 깨지지 않고 무사히 경선을 마치는 데 일조를 한 것으로 만족했다”고 토로한다.

 

이런 사나이로서의 당당함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4대강 문제가 언론에 떠들고, 청와대가 한나라당에 책임을 전가하는 국면이 조성되자, 그는 감히 “국민에게 자신의 의지도 없이 정당의 그늘에 숨는 비겁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며 ‘사나이답게 정정당당할 것’을 청와대에 주문한다.

 

그는 “우리는 통일 시대를 맞기 위해 부자나라, 부자 국민시대를 열어야한다”거나, “선진강국으로 가기 위해 지역갈등, 계층갈등, 세대갈등, 이념갈등을 뛰어 넘어야한다”거나, “최근 학자들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또 행정구역 개편 문제에는 “광역단체를 과감히 개편하여 전국을 40~50개 기초단체로 통합하고 도를 폐지하여 행정능률을 높이고 기초의원·광역의원도 통합하여 지방의원으로 격상시켜 국민들을 향해 선의의 경쟁체제를 도입하자”고 제기한다.

 

경제 분야의 경우 “한·EU, 한·중, 한·일, 한·아세안 FTA 뿐만 아니라 세계전역을 향해 문호를 열어야 한다”며, “내 자식 잘되기란 교육의 기회 균등으로 무상교육, 무상 의료제도를 과감히 도입하여 가난의 대물림을 막을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북과의 경제 협력 패턴은 진보정권 때와는 달리 철저히 투명성이 보장되는 방안을 수립한 후 제공되어야 한다”며, “우리가 늘 자랑하던 오천 년 단일민족 시대는 이제 아니다. 문화의 다양성과 타민족 포용력이 요구되는 혼합민족 시대로 가고 있으니 폐쇄성을 버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한민족 시대를 열어야 한다”며 열린 마음, 열린 시각을 강조한다.

 

끝으로 홍 의원은 “이제 우리는 오천 년 변방국가 시대를 털고 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서야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더 이상 우리 자손들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변방국가를 물려줘서는 안 된다. 가자, 가자, 모두 하나가 되어 세계 중심국가로!”를 주장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그는 늘 주장해 왔다.

“가진 자가 좀 더 양보하는 세상! 가지지 못한 자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세상! 그리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바른 세상, 세계 중심국가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고...

 

결국 홍 의원은 「변방」이란 에세이집을 통해서 가난했으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치열하고 정정당당하게 살아온 자신과 함께 독자들도 혹시 지금은 ‘변방’에 있더라도 용기 내어 자신과 함께 ‘중심권’으로 나아가자고 국민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른 선거와 깨끗한 나라'  이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