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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비리 공화국> ① "촌지는 집으로 보내세요"(연합)

말글 2010. 8. 18. 08:10

학부모 촌지 추방 결의대회(자료사진)

집 주소 적힌 교사 안내문에 학부모들 '어리둥절'
강남 일부 초교 촌지 30만원이나 50만원씩 연 4회
명품 핸드백에 학원비 대납, 도시락 배달까지 요구
"촌지 줬더니 태도 달라져..이 땅에 살아야 하나"

(서울=연합뉴스) 특별취재팀 = "난 절대 촌지 같은 것은 안 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학교 공개수업을 다녀온 뒤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더라고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딸을 둔 김미정(가명) 씨는 '촌지와의 전쟁'에서 허무하게 항복한 기억에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다.

   김씨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촌지가 만연해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는 일부 선생님과 부모의 잘못된 행동일 뿐 자신은 예외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원칙은 입학 3개월여가 지난 작년 6월 공개수업 때 무너졌다.

   김씨는 "선생님이 질문에 제일 먼저 손을 든 제 딸을 외면하고 다른 아이가 손을 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 아이를 시켰다"면서 "한두 번도 아니고 수업 내내 이런 일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신호를 주는데 지금이라도 빨리 학교에 가보라"는 친구들의 충고에도 김씨는 버텼다.

   이제 와서 무너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가 계속 불이익을 받진 않을까'라는 고민은 갈수록 깊어졌고, 심란한 마음이 아이에 대한 짜증으로 표출되는 지경에 이르자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몇 주 지나 결국 선생님을 찾아가 촌지를 줬다"면서 "촌지를 준 이후 선생님의 태도가 친절하게 바뀌는 것을 보고 이 땅에 계속 살아야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후 한 학기에 한 번씩 촌지를 챙기고 있으며, 올해 1학기에는 아이가 학급 임원까지 맡아 별도로 어머니회에 30만원을 냈다.

  
◇ 초등학교ㆍ고참 교사일수록 촌지 요구
예전보다는 촌지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학부모와 교사의 촌지 수수는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학구열이 높은 강남의 일부 초등학교에서는 아직도 1년에 4번, 매번 30만원이나 50만원으로 촌지를 주는 게 일반화된 곳도 있다고 학부모들은 전한다.

   강남 C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한 학부모는 "대부분의 학부모가 입학 직후, 스승의 날 전후, 추석, 학년 말 등 4번 정도 촌지를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몇 년 전까진 30만원이었는데 최근에는 50만원으로 높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촌지문화는 초등학교일수록, 교사 나이가 많을수록 심하다는 게 학부모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경기도 수원에서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키우고 있는 한 학부모는 "초등학교는 담임 선생님이 전 과목을 담당하는 데다 아이들이 어려서 선생님이 같은 말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큰 상처가 돼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말했다.

   서울 목동의 다른 초등학생 학부모는 "젊은 선생님들은 거의 안 받는데 50대가 넘은 선생님들은 관행적으로 받아와서인지 주면 자연스럽게 받고 일부 선생님은 은근히 바라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학생에게 노골적으로 불이익을 주거나 알림장을 통해 아이에 대한 지적이 반복적으로 적시되면 '촌지를 가져오라'는 일종의 신호라고 한다.

   강남에서 초등학교 2학년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 학부모는 "촌지를 줄 생각이 없었는데 알림장에 '아이가 산만해서 다루기 힘들다'는 내용이 몇 차례나 적혀 있어 주변에 물어봤더니 학교에 한번 오라는 얘기라고 하더라"며 "선생님을 찾아가 촌지를 준 다음부터는 이런 지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 최근엔 돈봉투보다 선물이 주류
요즘에는 감시와 단속이 심한 돈봉투보다 선물로 촌지를 대신하는 경우도 많다.

   현금은 아무래도 뇌물의 느낌이 강해 껄끄럽지만, 선물은 '성의 표시'로 포장하기 쉽기 때문인지 학부모와 교사 모두 거부감이 덜하기 때문이다.

   잠실에서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키우고 있는 박희진(가명) 씨는 "20만원 안팎의 선물을 학기 초와 추석 등 2차례 정도 하고 있다"면서 "지나가다 스쳐도 인연인데 반갑다는 의미로 드리는 것이지 뭘 바라고 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일부에서는 이런 수준을 뛰어넘는 고가의 선물이 오간다는 점이다.

   강남구 개포동에서 초등학교 2학년 아이를 키우고 있는 최지윤(가명) 씨는 올여름에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300여만원을 들여 선생님에게 줄 명품 핸드백을 면세점에서 구입했다.

   최씨는 "선생님이 명품을 좋아해서 해외여행을 갔다 오면서 명품 선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서운해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하나 마련했다"고 말했다.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학부모 홍윤경(가명) 씨는 "외국여행을 다녀오면서 명품 지갑을 선물로 드렸으나 지갑 안에 돈을 넣지 않았다고 기분 나빠해 하는 선생님도 있다"고 말했다.

   학기 초에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교사도 있다.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초등학생 학부모는 "선생님이 학기 초에 참고하라며 학부모들에게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줘 잠시 어리둥절했다"면서 "주위에 물어보니 학교는 남의 눈치가 있으니 선물은 집으로 보내라는 의미라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단순히 선물과 돈을 받는 것을 넘어 교육자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 같은 행동으로 아이를 맡긴 학부모를 어이없게 만드는 사례도 있다.

   강남구의 다른 초등학생 학부모는 "급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반 아이들 부모에게 돌아가면서 매일 도시락을 싸오도록 요구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자기 아이의 학원비를 제자 부모에게 대납시키는 선생님도 있다"고 말했다.

  
◇ "촌지 수수 근절하려면 일벌백계해야"
교육 전문가들은 뿌리 깊은 촌지나 찬조금의 관행이 무엇보다 교사와 학부모 간 불신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유형근 한국교원대 교육학과 교수는 "학부모 입장에선 우리 아이가 불이익을 당해선 안 되겠다거나 내 아이를 더 잘 돌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촌지를 준다"며 "그러나 장기적으론 이런 관행이 선생님들을 부정적으로 변화시켜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교육 현장에선 교장공모제나 교원평가제 같은 조치들이 촌지 문화에도 예방주사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가 들린다.

   다만 학부모 정미선 씨는 "1학기 말쯤 교원 평가를 했는데 너무 일찍 평가를 하니까 효과가 적어 학년 말에 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김명신 시의원은 "촌지나 불법 찬조금을 없애려면 적발됐을 때 다시는 교단에 설 수 없도록 퇴출시키는 강력한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며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면 절대로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0/08/18 07:29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