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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야당의 한심한 작명 솜씨를 보라(대자보)

말글 2016. 1. 27. 22:32

제1 야당의 한심한 작명 솜씨를 보라(대자보)

     

[정문순 칼럼] 영어 문법을 당명에 앉히는 정당, 만년 2등 벗어나지 못할 것

 

내 세대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영어 알파벳을 익혔다. 기저귀 찬 아이에게 꼬부랑말을 가르치는 지금 세태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도 영어를 배웠지만, 집에서도 영어 과외 지도를 받는 ‘특혜’를 누렸다. 과외 선생은 내 아버지였다.

과외 수업을 받은 것은 나만이 아니고 모든 형제들이 다 그랬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자식들에게 관심도 없었던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본인도 귀찮은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컵’을 ‘꼬쁘’, ‘닥터’를 ‘독터’라고 발음하는 아버지와, 나는 3년 동안 정말이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야 했다. 수업교재는 내 영어교과서 한 권을 함께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학습자의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을 믿었던지, 아버지는 단원마다 처음 나오는 단어와 뜻을 몇 번 읽어주고 나서 내게 그 자리에서 다 외우라고 채근했는데, 그런 무성의한 방식도 내게는 고역이었다. 공부하기 싫다고 도망가는 내게 아버지는 매질도 서슴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를 놓아 준 것은 당신의 실력이 고등학생 가르칠 역량이 못됨을 스스로 인정할 때였으니, 멘토 없이 혼자 감당해야 했던 영어 공부가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그때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그런 영어를 익힐 때 장벽 중의 하나가 우리 문법에는 없는 관사였다. 관사는 그것이 이끄는 명사의 의미에 따라 종류가 달라지니, 그 의미라는 것이 한국어를 쓰는 사람의 의식 체계로서는 쉽게 집어내기 힘들 만큼 미묘한 것들이어서 아무리 '학이시습지'를 해도 관사 쓰임새를 온전히 익히기는 힘들었다. 관사 ‘the’처럼 의미는 없이 문법적 기능만을 맡는 낱말은 그 나라 언어의 자존심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관사가 특별히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부려 쓸 줄 아느냐 모르느냐가 영어 구사 능력과 관계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조사’(토씨)나 ‘어미’(씨끝) 같은 문법 성분의 활용(꼴바꿈)이, 영어에서 관사가 차지하는 비중과 얼추 비슷할 것이다. 문법 요소는 그 말을 쓰지 않는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골치가 아프다. 가령 한국인들은 조사나 어미를 낱말의 뿌리나 줄기에 붙여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난공불락이며, 거꾸로 한국인들이 명사 앞에 언제 ‘the’를 쓰고 ‘a/an’를 쓰며 또는 아무 관사도 안 쓰는지 헷갈리지만 원어민들은 신통하게도 틀리는 법이 없다고 한다. 영어 관사의 활용은 영어 구사 능력이나 영어 문화권의 습득 정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안철수가 떨어져나간 새정치국민연합의 바뀐 당명을 들었을 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장난이라면 모를까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 이름을 지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일국의 제1야당이 당명에 외국어를, 그것도 그 언어의 정수에 해당하는 성분을 들어앉히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 정당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어차피 오래 못 갈 것이다. 제1야당의 당명 수명은 5년이면 오래 가는 것이다. 다음 번 개명 때는 ‘더더민주당’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제1 야당이 콩가루 정당임을 나타내는 데는 그들의 작명 실력보다 더 좋은 증거는 없을 것이다. 영어 관사가 귀에 친숙하고 영어에 대해 저항감이 없는 이들을 배려한 작명은 영어에 친하지 않은 저학력 계층이나 50대 이후를 배제하겠다는 속내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어 못마땅하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가게 마련이니, 자기네를 좋아하지 않는 고령층을 배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저학력자를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무슨 발상인가. 젊거나 지식이 있는 계층하고만 놀겠다는 생각이니 공당으로서 자격이 의심스럽다.

이에 반해 ‘한나라’, ‘새누리’로 이어지는 여당의 토박이말 당명은 지지층을 염두에 둔 작명이긴 하지만 어쨌든 저학력자를 배려했으니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촌스러워 보이는 순우리말 당명을 고른 건 세련된 이름을 쓸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외국어는 고사하고 한자말도 어려워하는 자신의 지지층을 고려한 것이리라. 또 ‘민주’라는 오래된 당명을 전통이라고 집착하는 제1야당과 달랐다. 여당이 ‘공화당’ 이름을 계속 고집한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제1 야당은 도대체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는 열심이다.

문재인에게 안철수는 굴러온 돌일 수밖에 없고 안철수에게 문재인은 낡은 꼰대였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겉으로는 손잡고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절대로 화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손잡지 말았어야 한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충청권 김종필 세력의 도움으로 대선에서 이기고도 나중에 갈라선 것을 보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서로 자기 몫이 적다며 헤어졌을 것이다. 야당으로 있을 때 헤어지는 게 그나마 덜 꼴사나워 보이긴 했을 것이다. 제1야당이 집안싸움에 쏟는 열성의 한 방울이라도 박근혜 집단과 싸우는 데 썼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든 1등을 지키려는 자들과, 2등이면 어떠랴 생각하는 이들이 싸워봤자 해보나마나일 것이다. 지금 유신만 선포하면 박정희 정권과 완벽하게 닮아가도록 이 정권이 미쳐가는 데는 제1야당의 무능, 무기력, 무전략이 적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정희의 유신은 혼자서 한 것이 아니었다. 정권이 폭압적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으며, 독재가 가능할 수 있었던 데는 알아서 벌벌 긴 제1 야당의 도움이 있었다.

군사정권이 헌법을 정지하고 민주인사들을 잡아가둘 당시 신민당 당수 유진산은 왜 자신은 가택연금을 해주지 않느냐고 투정하여 정권이 군인 몇 명을 집 앞에 보내준 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그의 별명이 ‘사쿠라 야당’이었다. 말기 유신 정권이 폭압으로 자멸해가는 증상을 보였을 때도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무력했다. 재야에서 유신 반대의 목소리가 드높던 시절, 박정희가 김대중을 한 번도 독대한 적이 없는 것과 달리 김영삼을 비밀리에 만났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이번 선거에서도 볼 수 있는 제1야당의 면면은 그 얼굴이 그 얼굴일 것이다. 지방선거에 나온 낙방 거사들이 이번에는 정권을 견제하도록 국회에 보내달라고 할 것이다. 도돌이표의 제1야당을 봐야 하는 유권자들만 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