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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고·강연도 재벌이 하면 사회봉사?(한겨레신문)

말글 2007. 9. 7. 11:51
신문기고…강연…이상한 사회봉사명령, 판사들도 “처음 본다”
한겨레 노현웅 기자
» 정몽구회장(맨 왼쪽)이 자리에 앉아 재판부의 판결 이유를 듣고 있다. 법정에서는 사진촬영이 허용되지 않아 김영훈 화백이 법정 모습을 스케치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재능을,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재산을 공여하게 해 그게 당사자에게 부담이 되면 실형에 갈음한다고 생각한다. 감옥에 1년 가는 것보다…”

 

서울고법 형사10부(재판장 이재홍)가 정몽구 현대차 회장한테 전례가 없는 사회봉사 명령을 내려 논란이 일고 있다. 재판부는 정 회장에게 2013년까지 8400억원을 출연해 저소득층을 위한 문화시설을 건립하고 환경보전 사업을 하며, 준법경영을 주제로 전경련 회원들에게 2시간 이상 강연을 하고, 일간지에 같은 주제로 기고할 것 등을 명령했다.

 

법원이 이런 내용의 사회봉사 명령을 내린 것은 이례적이다. 이 부장판사 역시 “(이런 사회봉사 명령은)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사회봉사 명령이 다양하기는 하지만 이번은 독특하다”며 “기고와 강연, 재산 출연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대법원 예규는 자연보호, 복지시설 및 단체 봉사, 공공시설 봉사, 대민 지원, 지역사회에 유익한 공공분야 봉사활동 등을 사회봉사 명령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법원이 정 회장한테 내린 사회봉사 명령이 제도의 취지와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 서초동의 김아무개(38) 변호사는 “사회봉사 명령은 범죄자한테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잘못을 뉘우치고 봉사하도록 하는 제도”라며 “돈 많은 사람한테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본래 취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부가 ‘강연’을 명령하고 신문 기고를 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어이없다’는 반응이 많다. 강연 원고와 기고문 작성이라는 ‘사회봉사’가 부하 직원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형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어떻게 하면 죄 짓고 빠져나올 수 있는지 기법이라도 전수하라는 것이냐”고 비꼬았다. 게다가 재판부는 정 회장이 출연을 약속한 8400억원 가운데 집행유예 기간인 5년 동안 6천억원만 출연을 강제하고 나머지 2400억원은 ‘담보’ 없이 “성실히 출연을 이행하라”는 판결을 내놨다. 집행유예가 끝난 뒤 개인사정 등을 들어 출연을 거부할 수 있는 빌미를 남긴 셈이다.

 

법원은 지난 6월 회계조작과 사기대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성원건설 전윤수 회장한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면서 독거노인에 대한 도시락 배달 등 20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내린 바 있다. 또 연예인 이경영·윤다훈·이승연씨 등이 사회봉사 명령을 받아 장애인복지시설 등에서 봉사활동을 한 바 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