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별세한 황장엽(87)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선군사상'과 함께 북한의 양대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 꼽힌다. 그는 1997년 2월 망명 이후 김정일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했으며, 최근에는 3대 세습에 대해 날을 세웠다. 그러나 황 전 비서는 자신이 "그깟 놈"이라고 했던 후계자 김정은이 노동당 창건 65주년을 맞아 공식 등극하던 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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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南에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왼쪽)가 측근인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홍 전 총사장과 함께 1997년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해 만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순탄치 않았던 남한 생활 13년
'나 때문에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딸(1남3녀)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죽어가리라고 생각하니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나는 가장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반하였소.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 주기를 바라오.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소.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한 내가 얼마나 더 목숨을 부지할지는 알 수 없으나 여생은 오직 민족을 위해 바칠 생각이오.'
황 전 비서가 망명 직후인 1997년 2월 17일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에서 아내(박승옥)에게 쓴 유서(遺書) 중 일부다.
- ▲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해 온 황장엽 전 비서가 그해 4월 안가에서 서류를 읽고 있다.
황 전 비서는 100만명 이상의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던 때 '민족'을 위해 가족의 희생을 알면서도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13년8개월에 걸친 그의 남한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망명 이후 다양한 국내·외 활동으로 북한 실상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내세운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사실상 손발이 묶인 채 지내야 했다. 황 전 비서가 그토록 원했던 미국 방문은 망명 6년이 지난 2003년 10월에야 이뤄졌다. 자유로운 외국 방문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인 2008년 들어서 가능해졌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2006년 10월)에서 "김대중씨는 김정일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민족적으로 공조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김정일은 수백만 동포들을 굶겨 죽이고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들고 온갖 고통을 들씌운 민족 반역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족 반역자와 민족 공조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밝혔다. '햇볕정책'에 대해선 "적을 벗으로 보고 안심하게 되며 아픔을 잊어버리고 잠들게 하는 마취약이 과연 명약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 ▲ 지난해 9월 서울 논현동의 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실 개소식에 참석한 황장엽 전 비서. /연합뉴스
북한은 이런 황 전 비서를 계속 위협했다. 2006년엔 협박편지를 보냈고, 최근엔 '암살조'를 남파했다. 그러나 황 전 비서는 김정일 정권은 물론 후계자 김정은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 3월 방미(訪美) 중 강연에선 김정은에 대해 "그깟 놈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깟 놈 알아서 뭐하나"라고 말했다. 지난 8월 본지 인터뷰에선 "김정은인가 하는 어린아이가 후계자로 나선다고 하는데, 멸망을 재촉하는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또 지난 4월 암살조 구속 직후 본지 인터뷰에선 "내가 몇 살인데 그런 거(암살조) 신경 쓰겠느냐. 내 존재로 북한의 악랄함을 알리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했다.
- ▲ 올 3월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했던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워싱턴 D.C.의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AFP
◆김일성·김정일 측근에서 배신자로
황 전 비서는 1923년 1월 평남 강동군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평양상업학교와 일본 주오(中央)대 법대에서 공부했다. 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가 1946년 조선노동당에 입당했으며, 모스크바대(철학부) 유학을 거쳐 1954년 김일성종합대 철학강좌장(학과장)이 됐다. 황 전 비서는 1958년 1월 김일성의 이론서기(비서)로 임명되면서 '김일성 사상'으로 통하는 주체사상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5년부터 김일성대 총장을 14년간 역임하고, 1979년부터 주체사상연구소장을 망명 직전까지 맡으면서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 초 김일성대에서 김정일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친 적도 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는 정치색이 옅고 학자인 황 전 비서를 좋아했다. 김정일의 경우 황 전 비서 외아들의 결혼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황 전 비서 아들은 장성택의 조카와 사랑에 빠졌는데 당시 장성택과 사이가 나빴던 아내 김경희(김정일 여동생)가 '장성택·황장엽 집안'의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김정일이 "젊은 것들이 떨어지지 않으려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라며 결혼을 성사시켜 줬다고 한다.
그러나 황 전 비서는 1990년대 중·후반 수백만명이 굶어 죽는데도 1인 독재 유지에만 급급한 김정일과는 같이 갈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주체사상은 '인간'이 중심이었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은 '김씨 왕조'가 중심이었다. 황 전 비서는 1997년 2월 망명 당시 "인민이 굶어 죽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라고 했다.
"김정일도 한땐 볼 붉은 소년… 사람의 마음 남아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