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원리로 만든 중국어 자판, 중국 표준될까? | ||||||||||||||||||
[학술] 영어 보다 빠른 안마태 신부의 <안음 3.0>, 중국 반응 뜨거워 | ||||||||||||||||||
지난 7월 3일부터 3일 동안 중국 연길에서는 “’07 다종언어 정보처리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한국 48명, 북한 16명, 중국 소수민족 대표 11명을 포함한 중국 50명, 미국 3명 등 총 110여명의 학자들이 참석했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다국어 입력방식, 정보처리와 음성 인식, 자연어 처리와 기계번역, 정보통신기술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회의장 들머리엔 중국어 자판을 시연하는 자리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안마태 신부가 한글을 이용한 중국어 자판 “안음(安音) 3.0”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이 자리엔 미국 국적의 한국인 안마태 신부(성공회) 가 중국인 직원들과 함께 안음 3.0을 설명하기에 바빴다. 중국의 고민을 단 번에 해결해 준 안음 3.0 안음 3.0은 이렇다. 한어병음(漢語倂音)에서처럼 한 낱말을 소리 나는 대로 자판에 옮기되 그동안 발음기호로 써왔던 영어 대신 한글을 이용한다. ‘등소평’이라는 이름을 자판에 옮긴다 치면 鄧小平이라는 글자 하나하나를 차례로 찾아내 치는 대신 그것의 중국식 발음인 ‘덩샤오핑’을 한글로 친다. 그러면 鄧小平이라는 이름이 한자로 뜨게 된다. 소리글자인 한글이 뜻글자인 한자의 발음기호 역할을 해주기에, 또 그가 개발한 소프트웨어 속에 ‘鄧小平’이라는 낱말이 입력돼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중국인 직원이 세 키를 동시에 치니 순식간에 모니터 화면에 한자가 출력되면서 중국어가 스피커로 튀어나온다. 시연을 보던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그동안 우리는 중국어를 컴퓨터에 입력하는데 한글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알아 왔는데 단번에 입력해 버린 것이다. 안마태 신부는 말한다. “중국어 자판 ‘안음 3.0’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습니다. 대표적인 반응이 ‘중국의 역사를 바꿔 놓을 작품’이라는 표현이었지요.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인의 뒷다리를 붙잡은 대표적인 장애물이 한자라는 문자였기에 당연한 반응이라 할 것입니다. 내가 개발한 방식으로 입력할 경우 영어에 비해 최소한 3배 이상 빠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요?.”
지금 중국에서는 안음 3.0을 중국어 자판의 표준으로 삼자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중화사상으로 뭉친 강대국 중국의 자존심이 과연 그것을 허락할지 모르지만 한자가 실제 정보화에 걸림돌이 되어왔기에 그들의 고민은 이제 시작된 것이다. 독재정권에 미국으로 쫓겨나 세벌식 자판 개발하다. 하지만, 안마태 신부가 안음 3.0을 개발하기까지는 순탄치 않은 그의 과거가 있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기에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대학 1학년 때 군에 입대했다. 미군부대에 배속된 덕분에 영어를 배우고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고, 부대 내에서도 다닐 수 있는 메릴랜드대학에서 공부했다. 제대를 하자 연세대 신학대학으로 적을 옮겨 신학을 공부한 뒤 1966년 성공회 신부가 되었는데 몇몇 성직자들과 도시산업선교회를 조직해 노동운동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군사독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때여서 중앙정보부에 자주 끌려 다녔고, 1969년 미국으로 두 번째 유학을 떠났다. 유학이라기보다 사실상 망명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도 하고 성직자 노릇도 하면서 이민자 동포를 돕는 사업을 했다고 한다. “1977년 ‘뉴 라이프(New Life)’라는 한글 월간지를 발간했는데 당시는 납 활자시대여서 인쇄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일본에서 사진식자기를 구입했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습니다. 수동식 사진식자기를 자동화하겠다는 생각에서 고성능 미제 사진식자기를 사다 알파벳을 한글로 갈아 끼우는 작업을 했지요. 그때부터 한글 자판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1980년대 초 세벌씩 타자기로 유명한 공병우 박사가 미국으로 건너가 컴퓨터 공부를 하면서 한글 문서편집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었기에 안마태는 공병우를 자주 만나 그의 작업을 돕는 한편 한글 자판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동시 입력이 처음으로 완성된 것은 1999년이었다. 연변대 교수와 공동 개발했다. 그 결과를 선양(沈陽)에서 개최된, 한ㆍ중ㆍ일 3개국 대표가 참가한 문자입력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그 무렵 안마태 신부는 한국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중국의 북경대, 일본의 릿쿄대(立敎大) 등 에서 강의를 했는데, 문자 입력 분야에서 그만큼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가 개발한 세벌식의 가장 큰 장점은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한글의 경우, 글자 한자를 만드는데 평균 2.5개 자모가 필요합니다. 거기에 문장부호를 넣고 띄어쓰기도 해야 하므로 최소 3번을 쳐야 글자 한 자를 만들 수 있지요. 그런데, 3벌식의 경우 세 번 칠 것을 한 번 침으로써 해결할 수 있어 계산상으로는 세 배나 빠른 것입니다. 하지만 두벌식의 경우도 양손으로 치기 때문에 두 배 정도 빠르겠지요.”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미국 국적자가 되었지만, 미국에서만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한글 자판을 개발하고 있었기에 10ㆍ26사태가 발생한 직후부터 한국을 자주 드나들었고, 자신이 공 들여 개발한 세벌식을 국가 표준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안마태 신부, 한국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날다. 1993년 당시의 상공자원부는 기술표준원에서 제정한 KS 5601 두벌식 표준 자판에 별 문제가 없다며 세벌식을 평가절하 했다고 한다. 몹시 화가 난 그는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평가가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중국어 자판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가 내몬 기술이 중국을 도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는 중국어 입력 방식을 낱글자로 해결하지 않고 낱말로 해결하려 했다. 수 만 개나 되는 글자 가운데 필요한 글자 한 자를 찾아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낱개의 글자 하나하나로 접근하기보다 글자가 모여 형성된 단어로 접근했다. 시제도 없고 조사도 없어 복잡한 문법이 필요 없는 중국어에서는 단어만 알면 문장 연결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어 자판과 같은 고난도의 작업은 소수의 인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1994년 중국 단동(丹東)으로 건너가 ‘단동안마태계산기개발공사’라는 회사를 차리고 중국어 자판 개발에 나섰다. 그가 단둥에 둥지를 튼 것은 나름대로의 노림수가 있어서였다. 그 무렵 그는 미국 기독교연합회에서 활동하며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평양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거기서 그는 북한에서 개발한 음성인식기가 꽤 높은 수준임을 알았다. 또한 북한에 소프트웨어 분야의 인재가 많고 한글 연구가가 많음도 알았기에 중국어 자판 개발을 직접 하지 않고 북한의 조선컴퓨터센터에 맡겼다. 중국어 자판 개발은 쉽지 않았다. 글자 구성의 기본 요소인 모음과 자음의 구분이 없고, 또 글자 수가 수만 개나 되는 한자를 컴퓨터나 휴대폰 자판에 앉힌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개발에 착수한 지 11년 만인 2005년에 ‘안음(安音) 1.0’이라는 첫 작품을 내놓았다. 그 속에는 1만 3천 개의 단어가 들어 있어 중국어 소사전이라 할만 했다. 1년 뒤인 2006년에 6만 5천 개의 단어가 들어 있는 ‘안음 2.0’을 선보인데 이어, 다시 지난 6월에는 그것을 업그레이드한 ‘안음 3.0’을 발표했다. 6만 5천 개나 되는 단어가 들어 있어 웬만한 낱말은 다 처리할 수 있다. 아직도 문자혁명이 진행 중인 중국에서는 새로운 글자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어 사전을 현행화하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 한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문자 중 하나지만 글자 자체가 어려워 문맹이 많았다. 평민은 대부분 까막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자의 폐해를 깊이 인식한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잡자 1958년 과감하게 문자 개혁을 단행했다. 북경 말을 표준어로 통일했고, 복잡한 한자를 간체자(簡體字)로 간소화했으며, 한어병음(漢語倂音) 곧 중국어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하도록 했다. 그런 식으로 중국의 문자 개혁은 진행되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그처럼 대대적인 문자 개혁을 단행했음에도 불편함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말한다.
안마태 신부의 중국어 자판은 큰 방향을 일으켰다. 그가 활동하고 있는 단둥시에서는 그의 작품을 직업학교에서 쓰겠다며 그의 도움을 청했으며, 일본에서는 저작권을 사겠다며 접근해 왔다. 그의 작품을 장난감으로 만들어 판매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사람도 있었다. 중국인의 교육열이 대단히 높음을 감안할 때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번 개발 프로젝트로 일본어 자판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한 소프트웨어회사가 일본어 자판 개발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대상을 영어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한글을 발음기호로 삼아 영어 자판을 만들게 되면, 입력 속도가 현재보다 2~3배 빨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어를 속기식으로 입력할 수 있는 새로운 자판이 탄생하게 됩니다. 상업성을 감안해 먼저 영어로 된 장난감 자판부터 개발하려고 합니다.” “쓸데없이 영어 쓰지 말아야” 대담을 끝내면서 38년 미국 생활의 안마태 신부는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익숙하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쓴소리를 내뱉는다. “어떤 간판에 ‘할리우드 테일러샵’이라고 쓰고 옆에는 ‘聖林洋服店’이라고 쓴 것을 보았어요. ‘할리우드’가 ‘성탄나무의 숲’이란 생각에서 그렇게 쓴 모양인데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구멍가게에 왜 크다는 뜻의 슈퍼를 붙여 ‘슈퍼마켓’이라고 붙였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또 ‘파크’라고 쓰여 있어서 무슨 공원일 줄 알았더니 ‘러브호텔’이었습니다. 쓸데없이 영어를 써서도 안 되지만 영어를 쓸려면 제대로 써야 합니다. 나는 컴퓨터 자판에 알파벳 입력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글의 세계 최고의 글자입니다. 중국의 고민을 단 번에 해결해 줄만한 그런 글자인 것입니다. 제 나라 위대한 글자는 홀대하고 영어에 미친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몇 년 전, 이기열 작가는 ‘천지인’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휴대폰을 개발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는 벤처기업가의 창업 이야기였다. 그 소설 속 주인공의 꿈은 남달랐다. 한글을 중국어의 발음기호로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휴대폰 속에 내장해 중국으로 수출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한자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인에게 디지털시대의 문자인 한글을 이용해 편하게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었다. 한글로 중국을 제패하겠다는 야심과 함께 우리의 위대한 글자를 남과 나눠쓰자는 “더불어 사는 삶”이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소설이 이제 현실로 다가왔다. 예술가들의 꿈은 미래에 실현되는 것이라나? 잊혀 가고 있던 그 꿈이 연로한 한 전문가의 집념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이제 중국인들이 한글로 컴퓨터를 치고 휴대폰을 두들길 날도 멀지 않을 듯하다. 한글이 그만큼 과학적인 문자라는 뜻이다. ‘세종임금은 분명 600년 뒤에 올 디지털시대를 예견하고 한글을 만들었다.’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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