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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말살정책?… 한글 파괴하는 행정기관(경향닷컴)

말글 2007. 10. 9. 08:48
우리말 말살정책?… 한글 파괴하는 행정기관
입력: 2007년 10월 08일 18:30:06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이 홈페이지 등에 소개해놓고 있는 산하 위원회·기관과 행사·축제 명칭. 국적불명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용어 투성이다.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으로 인한 우리 말 파괴 풍조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 행정기관의 외래어 남용 실태가 갈수록 도를 넘어서고 있다.

행정자치부는 지난달부터 전국의 ‘동사무소’ 이름을 ‘동주민센터’로 바꾸기로 하고 현판 교체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서울시 일부 자치구는 관내 행정구역명을 ‘타운’으로 바꾸겠다는 계획이다.

중앙 부처가 내놓는 정책은 국적불명을 뛰어넘어 알아듣지 못할 용어 투성이다. ‘클러스터’ ‘허브’ ‘버블세븐 지역’ ‘TF팀’ ‘넷포터’ ‘원스톱 서비스’…. 한글단체에서 정부부처 홈페이지와 보도자료에서 많이 쓰인 외래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의 15%만이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청와대가 발표한 내용 중에는 “‘로드맵’을 명료하게 만들어 혼선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이번 회담성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 프로세스’가 시작됐다는 점”이란 표현이 들어있다.

전주의 한 지방도로에 표시된 ‘언더패스’ 노면표지. /네티즌 제공
숫제 암호문 수준으로 진화한 곳도 흔하다. 최근 정보통신부가 내놓은 보도자료들은 ‘주력 기간산업과 연계한 임베디드 SW 개발을 신규로 추진’ ‘CMMI 레벨 기준’ ‘TTA의 GS인증 대기기간’ ‘SW공학 발전 로드맵 수립’ 등 정확한 개념조차 알기 어려운 용어로 가득차 있다. 정통부는 지난 4일 대구시와 공동으로 개최한 섬유업과 컴퓨터 기술을 접목시킨 축제의 이름을 ‘웨어러블 컴퓨팅 패션쇼’로 명명했다.

새로운 개념을 담고 있어 한글화가 어렵다는 변명이지만 한글단체들은 영어에 의존하는 태도를 바꾼다면 얼마든지 바르고 쉽게 한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부처별 위원회·행사 소개는 정도가 더욱 심하다.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가 주최하는 ‘지역혁신박람회’ 상징 로고위에는 ‘Go Region, Get Vision’이란 영문 슬로건이 버젓이 쓰여있고, 행자부의 ‘정부혁신관’은 ‘Inno Vision’이란 영어 명칭 위에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표시돼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외래어 남용은 가관이다. 서울시는 주요 사업명에 ‘시프트’ ‘디자인월드플라자’ ‘도시갤러리프로젝트’ 등 영어를 빼놓지 않거나 아예 영어로만 짓고 있다. 한글단체들의 비판이 잇따르고 있지만 좀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산하기관의 명칭은 SH공사(옛 도시개발공사), 서울메트로(옛 지하철공사)로 바꾸고 클린도시추진반, 민원콜센터운영반, 문화콘텐츠팀 등 부서명에도 영어를 붙이고 있다.

대구시는 ‘2007 컬러풀 대구 페스티벌’ 행사 중에 ‘동성로 DBG다’란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프로그램에 대해 주최 측은 “소리나는 대로 읽으면 경상도 사투리로 ‘디비지다’가 된다. 축제가 정열적인 행사란 뜻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자체가 관리하는 전국 지방도로 곳곳에는 다른 도로의 아래를 지나는 도로란 의미로 ‘언더패스(underpass)’란 엉터리 영어가 버젓이 표기돼 있어 실소를 사고 있다.

한글문화연대 대표 고경희씨는 “올바른 국어사용에 앞장서야 할 관공서가 우리말 파괴 풍조를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면서 “국민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용어를 내놓으면 정부가 뜻하는 것을 국민들이 따라갈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기범기자〉